이 행주대첩의 지휘관이었던 권율은 그래서 무장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지만 사실 문관출신이다. 그는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등 주요 문관직을 거쳤다.
관직생활을 꽤 늦게 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권율은 자신의 사위인 이항복보다 2년이나 늦은, 마흔여섯살의 나이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평균 합격 나이는 35세.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기에 마흔여섯이면 적지않은 나이였다. 자기 아들나이인 동기들과 하급관리 수습생활을 거치며 여러 설움도 겪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과거시험을 줄줄이 떨어져서 늦게 들어간 것도 아니다. 권율은 머리도 좋고 재주도 좋을 뿐만 아니라 한때 영의정 자리에도 올랐던 아버지 권철의 뒷배를 통했다면 얼마든지 높은 관직을 얻을 수 있었던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40이 다 되도록 한량같은 생활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자발적인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다.
친구들은 그를 볼 때마다 과거를 보든지 집안 뒷배로 벼슬을 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 했지만 권율은 "주나라 때 강태공은 나이 80에 벼슬을 얻어 천하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했으나 아직 내 나이는 강태공의 절반밖에 안되고 재주도 미치지 못해 출세가 늦을 것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한때 지리연구에 관심을 보여 전국을 뜬금없이 여행하며 몇 년씩 집에 안들어가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바꾼 것은 아버지 권철의 죽음이었다. 권철은 죽기 전 막내아들인 권율을 쳐다보며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듣고 크게 반성한 권율은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하고 나와 과거시험을 보고 합격했다고 전해진다.
벼슬길에 오른 이후에도 사위 이항복과 함께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겼다. 한 야사에 따르면 하루는 이항복과 함께 궐로 출근하는데 이항복이 관복 안에 입는 옷을 입기 더우니 관복만 입고 가자는 말에 속옷을 벗고 갔다. 그런데 어전회의 도중 이항복이 임금께 날씨가 너무 더우니 관복은 벗고 회의를 하자고 했고 이에 대신들은 모두 옷을 벗었는데 혼자 벌거벗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조 임금이 왜 혼자 벌거벗었냐고 물어보자 당황하던 권율을 구한 것도 이항복이었다. 이항복은 임금에게 "헐벗은 백성들을 생각해 두꺼운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생각하시어 그렇게 입고 온 것"이라고 답변해 장인을 구제해준다.
체격은 아버지 권철을 닮아 8척 장신에 매우 듬직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지며 어릴 때부터 성격이 담대했다고 전해진다. 비록 늦게 관직을 시작했고 갑작스럽게 큰 전쟁을 맞아 장군이 됐지만 침착하게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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