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압구정엔 갈매기가 없다
경향신문 2016.10.10. 17:57
2000년 전의 역사서인 <사기>를 보면 “황제가 신선들이 좋아하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동성왕과 무왕은 궁성에 못을 파고 누각을 세워 기이한 짐승을 기르고, 군신잔치를 베풀었다”는 <삼국사기> 기록도 있다.
궁중의 휴식공간이던 이같은 누정은 후대에는 음풍농월하던 사대부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가장 유명한 정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압구정일 것이다. 지금도 ‘부티’나는 동네의 상징으로 운위되고 있으니 말이다.
압구정(狎鷗亭)은 송나라의 어진 재상 한기의 서재 이름에서 땄다. 명나라 예겸(1415~1479)이 중국을 방문한 한명회에게 붙여주었다.
“기심(機心·기회를 엿보는 간교한 책략)이 없는 사람이라야 갈매기(鷗)와 친할 수 있다(狎)”는 것이었다. 한명회에게 ‘순수하게 살아가라’는 덕담의 차원에서 지은 것이다.
그러나 한명회는 다른 길을 갔다. 1481년(성종 12년) 절친인 명나라 사신 정동이 조선을 방문하자 ‘기심’이 발동했다.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싶어하니 허락해달라”고 청한 것이다.
한명회는 세조 때의 공신이자 장순왕후(예종비)와 공혜왕후(성종비)의 아버지였다.
무서울게 없었던 한명회는 궁중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장막을 내려달라고 ‘감히’ 성종에게 요구했다.
기가 막혔던 성종이 “연회는 압구정이 아닌 제천정(왕실소유)에서 베풀라”는 지시를 내렸다. 화가 난 한명회는 “아내가 아프다”면서 제천정 연회에 불참했다.
한명회의 도를 넘는 무례함에 성종 임금도 폭발했다. 압구정 뿐 아니라 한강변에 들어선 사대부의 정자를 모조리 철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앞으로 중국사신이 올때마다 한강변 정자를 모두 돌며 유람하고 연회를 베풀 것이 아니냐. 그 페단을 어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참으로 지당한 어명이 아닌가. 이후 압구정엔 갈매기가 한마리 날지 않았다니 친할 압(狎) 대신에 누를 압(押)자를 썼다는 씁쓸한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조선 후기 문신 엄경수(1672~1718)의 답사기를 토대로 한강변 29곳의 누정을 조사·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소식을 들으니 새삼 욕심을 버려야 갈매기와 친해질 수 있다는 ‘압구정’의 고사가 떠오른다.
<이기환 논설위원>
압구정·읍청루..조선시대 한강 품었던 29개 누정이 살아난다
경향신문 2016.10.10. 21:41조선이 한양(서울)을 도읍으로 삼은 이래 한강은 전국에서 으뜸가는 명승으로 손꼽혔다. 사대부들은 한강변 수려한 풍광 속에 누각과 정자를 세우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때로는 한강 물길을 따라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조선 후기 문신인 엄경수(1672~1718)도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꼭 300년 전인 1716년, 엄경수는 한강에 배를 띄우고 거처였던 서울 양천에서 출발해 멀리 미호(渼湖·현 경기 남양주시 삼패동 등 한강변 일대), 팔당대교 인근까지 향했다.
한가로이 풍광을 즐기던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강변의 누정들이었다. 그는 “기둥과 지붕, 난간과 담장이 숲과 나무 사이로 빛나고 어우러져 배를 맞이하며 앞다투어 나타났다”며 자연과 어우러진 누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는 자신이 본 누정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대강의 위치와 함께 누정의 유래·연혁까지 적어 ‘연강정사기(沿江亭사記)’라는 제목의 글로 남겼다. 한명회가 지은 정자로 지금도 유명한 ‘압구정’을 비롯해 한강변 누정 29개가 ‘연강정사기’에 실렸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성균관대 산학협력단에 연구용역을 발주한 ‘명승 관련 신사료 연강정사기를 통한 18세기 한강 연안 명승의 현황 및 복원방향 연구’란 보고서가 최근 완료됐다. ‘연강정사기’를 발굴하고 관련 논문도 발표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았다. 연구팀은 ‘연강정사기’를 토대로 옛 누정들의 위치를 추정하고, 각 누정에서 조망한 경관을 분석했다.
누정이 어떻게 지어져 누구로부터 누구에게로 이어졌는지와 누정에 얽힌 여러 시문도 함께 소개했다. 특히 기록이 전하는 경관자원들을 오늘날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제언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보고서를 토대로 29개의 누정을 문화유산 자원뿐 아니라 인문학적 이야기가 담긴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기 위해 복원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새 발굴 등 한강변 누정 29개 연구
안 교수는 ‘연강정사기’를 ‘한강변 누정에 대한 종합보고서’라고 평가했다. “전문연구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전혀 알지 못한 역사적 경관이 이 자료를 통해 부각되고 있으며, ‘연강정사기’ 이후로 지금까지 이에 필적할 만한 성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강정사기’를 토대로 한 이번 연구에서 새롭게 밝혀진 성과도 많다. ‘영벽당’ ‘팔승정’ ‘목은정’ ‘은파정’ 등 이제까지 연구에서 조명되지 않았던 한강변 누정 15개가 새롭게 발굴됐다. ‘복파정’ ‘족한정’ ‘창랑정’ 등 학계에 이름만 소개되고 연혁 등은 밝혀지지 않은 8개 누정의 새로운 관련 사실들도 밝혀냈다. 급속한 한강 개발로 더 이상 볼 수 없는 한강 고유의 자연경관도 이번 연구를 통해 상상해볼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를 통해 29개 누정의 구체적인 위치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강정사기’에 기록된 29개 누정 중 원형 그대로 남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연구팀은 엄경수의 서술 내용을 바탕으로 다른 여러 문헌자료와 근대 지도를 함께 분석해 여러 누정의 위치를 추정했다. 앞으로 누정의 복원 등 활용을 감안하면 무엇보다 위치 확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강변 경관을 원래 상태로 복원하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앞으로 자연경관과 인공경관이 잘 어우러지도록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라진 한강변 누정들의 실체를 밝히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도 풍성하게 발굴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한강 유람에 인문학적 스토리텔링을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는 것도 연구 성과다.
■복파정, 담담정, 압구정, 사의정… 한강변의 누정들
‘연강정사기’는 서울 마포 당인동 인근으로 추정되는 ‘복파정’부터 미호 상류의 ‘김씨장’까지 29개 누정을 아우른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압구정’이다. 엄경수는 압구정을 “한강 남쪽 강안에 있다”며 “고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정자”라고 소개했다. ‘벼슬의 바다에서도 갈매기와 친할 수 있다’는 당호의 유래도 적었다. 조선시대 압구정의 위세는 대단했다. ‘연강정사기’에 나오는 누정 중에 관련 시문이 가장 방대하게 확인되는 곳도 바로 압구정이다. 조선의 문사들은 “삼선은 청천 밖으로 절반이 떨어졌고, 이수는 백로주에서 가운데로 나뉘었네”라고 한 중국의 ‘시선’ 이백의 시구가 압구정의 경관과 부합한다고 여겼다. 당대 압구정의 아름다움은 겸재 정선의 그림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야경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한강 두모교 인근에는 ‘사의정’이 있었다. 엄경수는 사의정을 “맑은 바람과 밝은 달, 푸른 벼랑과 맑은 물결” 등 네 가지가 어울린다고 했다. 그래서 당호도 ‘사의(四意)’다. 숙종 때 명문장가인 오도일은 엄경수에 앞서 1638년 사의정을 찾아 “맑은 물결 멀찌감치 누르고 솟은, 푸른 숲속에 깊이 감추어진 정자”라고 했고, 1689년에는 조유수가 “바위 골짜기에 있는 사의정에 있다 보니 마치 산속에 있는 것 같아 배에 오를 일조차 잊을 정도”라고 했다.
엄경수가 배를 타고 놀던 때 건물은 이미 사라지고 터만 남은 누정들도 있었다. 안평대군이 1453년에 지은 ‘담담정’도 그중 하나다. 안평대군은 이곳에 만권의 책을 모으고 선비들을 불러 함께 시문을 지으며 결속을 다졌다고 한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그의 야심은 물거품이 됐고 담담정 역시 세조의 중신 신숙주의 소유가 되었다. 지금은 마포대교 인근 고개 위에 담담정 표지석만 남아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강희맹과 이승소는 시문을 주고받으며 담담정의 경관을 예찬했는데, ‘마포의 밤비’ ‘양화나루의 가을달’ ‘서호의 배 그림자’ ‘눈 내린 날의 낚시’ 등이 특히 아름답다고 했다. 워낙 풍광이 빼어나 왕이 직접 담담정을 방문했고, 중국 사신을 이곳에서 접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복원 가능성과 향후 과제는 - 대부분 추정지에 아파트…복원 위해선 인문·조경·지리 등 각 분야 후속연구 절실
지금의 한강과 조선시대의 한강은 전혀 다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한강변 누정에서 바라다보는 경관을 노래하며 ‘십리까지 아득하게 펼쳐진 백사장 위로 물새가 날고 있다’고 했다. 지금 그런 백사장을 찾을 수는 없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뚝섬과 압구정동·광나루·여의도 등 한강 곳곳에 모래벌판이 넓게 펼쳐져 있었지만, 급격하고 광범위한 도시 개발 이후 백사장은 사라지고 강변은 고층의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경관 자체가 달라졌기에 사라진 누정들을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누정은 물론 경관까지 복원해야 한다고 하면 더욱 일이 어렵다. ‘연강정사기’ 연구를 시작으로 광범위한 후속 연구가 진행돼야 하는 이유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한강에 있던 누정은 당대를 풍미한 명사들에 의해 경영된 것이 대부분”이라며 “누정 경영자는 물론 그들과 교유했던 이들의 문집까지 일일이 살펴가며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실사조사도 필수다. 엄경수가 그랬듯 배를 타고 한강 연안을 살펴야 하고, 누정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를 방문해 실제 경관도 조사해야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사는 “인문학과 조경학, 지리학, 지질학, 조경학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문헌조사에서 과학적인 공간 분석, 생태적 가치 연구 등을 아우르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학제 간 연구를 강조했다.
현재로서 복원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경기 남양주의 ‘김씨장’이다. 김씨장이 위치했던 자리는 지금도 당시 경관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누정 실물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면 수준 높은 복원도 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안 교수는 ‘담담정’ ‘읍청루’ ‘압구정’ 등 3곳도 문헌 기록과 그림이 자세하게 남아 있어 복원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복원이 당장 어렵다면 각 누정의 보다 구체적인 위치를 추정해 표지석을 세울 수도 있다. 안 교수는 “누정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모인다면 관광자원으로 한강을 이용하는 방법이 훨씬 다양해 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300년 전 엄경수처럼 양천에서 미호에 이르는 물길을 따라 뱃놀이를 즐기며, 조선 문인들의 풍류를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연강정사기’ 연구를 통해 명승에 대한 관심 제고의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지금의 ‘부루마불’ 게임처럼 전국 명승 120곳을 돌아다니는 주사위 놀이가 널리 유행했을 만큼 명승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이 쓴 책 <조선명승시선>에는 조선의 명승 1000여곳이 기록돼 있다. 앞서 내려온 풍부한 기록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책이다.
이원호 학예사는 “조선시대에 명승 유람은 단순 놀이 차원을 넘어서 자연을 가까이 하고 닮으려 하는 유교 의식을 체화하고 선대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가 있었다”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간 이어져온 명승에 대한 전통적 인식이 단절됐다”고 했다. 해방 이후 명승에 대한 학계의 연구도 부족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임원경제지> 같은 널리 알려진 문헌을 토대로 한 연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을 뿐 명승을 다룬 방대한 자료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은 없었다.
이번 ‘연강정사기’ 연구처럼 전국 명승에 얽힌 역사적·인문학적 의미를 새롭게 발굴함으로써 명승이 지닌 가치 또한 한층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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