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10-13 03:00:00
“6·25는 北-中-蘇共謀한 침략전쟁” 옛 소련 문서로 진실 드러나
“정의로운 전쟁” 미화했던 시진핑, 미중관계 악화하자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뒤늦게 “抗美援朝 전쟁” 홍보
한국에 끼친 상처 사과는커녕 시대착오적 역사왜곡 중단해야
6·25전쟁은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3인의 사전 공모로 시작된 침략전쟁이었다는 사실이 소련 붕괴 후 공개된 구(舊)소련 비밀문서에서 밝혀졌다. 그런데도 중국 정부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6·25를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도운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고 열을 올리면서 영상물을 통해 적극 홍보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부주석 때인 2010년, 중국의 6·25전쟁 개입을 과거 마오쩌둥처럼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면서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미화해 국제적 물의를 빚었다. 당시 후진타오 정부는 그의 견해가 중국 정부의 정론(定論)이라고 해명하면서도 미국을 의식해 이 무렵부터 이 같은 표현의 사용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경우 말고는 6·25를 지칭할 때 ‘조선전쟁’이라는 중립적 용어로 부르고 ‘항미원조’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TV 드라마도 검열을 통해 일절 억제했다.
그러나 시진핑 정부가 출범해 남중국해 문제로 미중관계가 악화하자 금년 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은 올 5월 방송망을 통해 반미적 TV 드라마 ‘38선’을 방영하고, 9월에는 추석을 맞아 상업영화 ‘나의 전쟁’의 극장 상영을 허가했다. 18일부터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BTV(베이징텔레비전) 만화 채널에서 방영할 예정이다. 영화 ‘나의 전쟁’의 경우 한국을 관광하는 중국 참전 군인들이 버스 안에서 “50년 전에는 여권이 아닌, 홍기(紅旗)를 들고 서울에 왔었다”는 등 한국을 모멸하는 홍보물을 텔레비전에 방영해 중국 국내외에서 큰 물의를 빚었다. 홍콩의 한 인터넷 TV는 이를 ‘중국의 수치’라고 맹비난했다.
중국 정부의 6·25전쟁에 대한 공식 견해는 드라마 ‘38선’의 첫 회 도입부의 내레이션에 잘 나타나 있다. 즉, ‘1950년 6월 25일 새벽 분열된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폭발해 미국의 공개적인 참전으로 조선반도의 내전이 국제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마오쩌둥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처음부터 6·25전쟁에 개입했다. 이 사실은 서방 학자들과 쉬쩌룽(徐澤榮·일명 데이비드 추이·중산대 교수), 선즈화(沈志華·화둥사범대 교수) 등 양심적인 중국 학자들에 의해 소상하게 밝혀졌다. 이 때문에 쉬쩌룽은 당국의 미움을 사 간첩죄로 1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다음 한국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한국 국민에게 끼친 상처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해야 하며 그것이 (한중 우호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전쟁 개입은 단계적이었다. 첫째, 마오쩌둥은 전쟁 1년 전인 1949년 5월 중공군에 배속된 3개 조선인사단을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북한군에 이양하기로 결정해 남침 때 인민군의 최전방 공격부대가 되게 했다. 이때 마오는 김일성 특사에게 무력통일계획을 자세히 묻고 필요한 경우 중국이 도울 수 있다고 밝혔다.
둘째, 1950년 4월경 스탈린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을 전제로 남침계획을 승인하자 마오는 한 달 후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남침작전 때 외국 군대가 개입하면 북한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김일성의 남침은 가능해졌다. 이에 대해 쉬쩌룽 박사는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연출자이자 감독이었다. 그는 육상선수를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제1주자인 김일성의 바통을 이어받을 제2주자 마오쩌둥까지 예비해 두었다”라고 지적했다.
셋째, 1950년 6월 말 미국의 파병 결정이 나자 마오쩌둥은 북한군의 남한 점령을 서둘러 완료하기 위해 조기 참전을 희망했다. 그는 중국의 즉각 참전을 간절히 바라던 김일성에게 스탈린을 설득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6·25를 내전으로 가장하기 위해 유엔군의 북한 진격 이전 중국의 참전을 불허했다. 마오는 이 무렵 동북군구 소속의 조선족 장교 200명을 인민군간부 교육을 위해 북한에 보냈다.
넷째, 마오는 1950년 10월 참전한 중공군이 다음 달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자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남한 ‘해방작전’을 명령했다. 중공군은 서울을 함락하고 평택까지 남하했으나 유엔군의 맹렬한 반격에 못 이겨 후퇴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자국민들, 특히 2세들마저 속이는 시대착오적인 역사 왜곡을 중지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해 발간한 저서 ‘6·25전쟁과 미국’(청미디어)에서 6·25전쟁의 발발 및 전개과정에 대해 상세히 밝힌 바 있습니다.
남시욱 객원논설위원 세종대 석좌교수
“정의로운 전쟁” 미화했던 시진핑, 미중관계 악화하자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뒤늦게 “抗美援朝 전쟁” 홍보
한국에 끼친 상처 사과는커녕 시대착오적 역사왜곡 중단해야
남시욱 객원논설위원 세종대 석좌교수
시진핑 국가주석은 부주석 때인 2010년, 중국의 6·25전쟁 개입을 과거 마오쩌둥처럼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면서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미화해 국제적 물의를 빚었다. 당시 후진타오 정부는 그의 견해가 중국 정부의 정론(定論)이라고 해명하면서도 미국을 의식해 이 무렵부터 이 같은 표현의 사용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경우 말고는 6·25를 지칭할 때 ‘조선전쟁’이라는 중립적 용어로 부르고 ‘항미원조’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TV 드라마도 검열을 통해 일절 억제했다.
그러나 시진핑 정부가 출범해 남중국해 문제로 미중관계가 악화하자 금년 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은 올 5월 방송망을 통해 반미적 TV 드라마 ‘38선’을 방영하고, 9월에는 추석을 맞아 상업영화 ‘나의 전쟁’의 극장 상영을 허가했다. 18일부터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BTV(베이징텔레비전) 만화 채널에서 방영할 예정이다. 영화 ‘나의 전쟁’의 경우 한국을 관광하는 중국 참전 군인들이 버스 안에서 “50년 전에는 여권이 아닌, 홍기(紅旗)를 들고 서울에 왔었다”는 등 한국을 모멸하는 홍보물을 텔레비전에 방영해 중국 국내외에서 큰 물의를 빚었다. 홍콩의 한 인터넷 TV는 이를 ‘중국의 수치’라고 맹비난했다.
중국 정부의 6·25전쟁에 대한 공식 견해는 드라마 ‘38선’의 첫 회 도입부의 내레이션에 잘 나타나 있다. 즉, ‘1950년 6월 25일 새벽 분열된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폭발해 미국의 공개적인 참전으로 조선반도의 내전이 국제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마오쩌둥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처음부터 6·25전쟁에 개입했다. 이 사실은 서방 학자들과 쉬쩌룽(徐澤榮·일명 데이비드 추이·중산대 교수), 선즈화(沈志華·화둥사범대 교수) 등 양심적인 중국 학자들에 의해 소상하게 밝혀졌다. 이 때문에 쉬쩌룽은 당국의 미움을 사 간첩죄로 1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다음 한국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한국 국민에게 끼친 상처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해야 하며 그것이 (한중 우호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전쟁 개입은 단계적이었다. 첫째, 마오쩌둥은 전쟁 1년 전인 1949년 5월 중공군에 배속된 3개 조선인사단을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북한군에 이양하기로 결정해 남침 때 인민군의 최전방 공격부대가 되게 했다. 이때 마오는 김일성 특사에게 무력통일계획을 자세히 묻고 필요한 경우 중국이 도울 수 있다고 밝혔다.
둘째, 1950년 4월경 스탈린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을 전제로 남침계획을 승인하자 마오는 한 달 후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남침작전 때 외국 군대가 개입하면 북한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김일성의 남침은 가능해졌다. 이에 대해 쉬쩌룽 박사는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연출자이자 감독이었다. 그는 육상선수를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제1주자인 김일성의 바통을 이어받을 제2주자 마오쩌둥까지 예비해 두었다”라고 지적했다.
셋째, 1950년 6월 말 미국의 파병 결정이 나자 마오쩌둥은 북한군의 남한 점령을 서둘러 완료하기 위해 조기 참전을 희망했다. 그는 중국의 즉각 참전을 간절히 바라던 김일성에게 스탈린을 설득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6·25를 내전으로 가장하기 위해 유엔군의 북한 진격 이전 중국의 참전을 불허했다. 마오는 이 무렵 동북군구 소속의 조선족 장교 200명을 인민군간부 교육을 위해 북한에 보냈다.
넷째, 마오는 1950년 10월 참전한 중공군이 다음 달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자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남한 ‘해방작전’을 명령했다. 중공군은 서울을 함락하고 평택까지 남하했으나 유엔군의 맹렬한 반격에 못 이겨 후퇴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자국민들, 특히 2세들마저 속이는 시대착오적인 역사 왜곡을 중지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해 발간한 저서 ‘6·25전쟁과 미국’(청미디어)에서 6·25전쟁의 발발 및 전개과정에 대해 상세히 밝힌 바 있습니다.
남시욱 객원논설위원 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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