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데스크에서] 진화하지 않는 현대차勞組

바람아님 2016. 10. 24. 09:20

(조선일보 2016.10.24 이인열 산업1부 차장)


이인열 산업1부 차장

월마트와 노동조합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집단의 힘으로 더 좋은 거래를 성사하는 조직'이란 점에서 같다고 본다. 

월마트는 수많은 점포를 통해 개별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한데 모아 공급자로부터 더 싸게 물건을 

확보함으로써 매출과 수익을 올린다. 노동조합도 개별 노동자를 모아서 사측을 상대로 높은 임금을 

요구(거래)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이치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노조의 위기를 다시 한번 거론하고 싶어서이다. 

지난 14일 현대차노조는 가까스로 내년 임금 협상에 합의했다. 협상 과정에서 올해도 예외 없이 

파업 카드가 등장했고, 그로 인한 손실은 3조1000억원, 1차 협력사를 포함하면 4조원을 훌쩍 넘겼다. 

그래도 이번엔 사측이 노조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래, 파업으로 4조원 날리는 것보다는 몇 백억원을 노조에 더 주고 말자"고 했을 것이다. 이번엔 달랐다. 

우리나라 노사 문화를 망친 주역이란 소리까지 나올 만큼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던 현대차가 왜 갑자기 바뀌었을까.



17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 아반떼룸에서 올해 임금협상 조인식이 열렸다. 윤갑한 사장(오른쪽)과 박유기 노조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산업의 패러다임이 달라진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안정적인 대량생산과 과점(寡占) 시스템이 붕괴한 것이다. 

그동안 현대차와 같은 과점 기업들은 막강한 수익을 내고 있었기에 노조의 무리한 임금 인상을 자체적으로 흡수하거나 

또는 노조의 이익을 들어주고 대신 가격을 올리는 방식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기술력은 비슷해지고, 가격 경쟁은 무한대로 확장된' 무시무시한 정글이 돼 버렸다. 

이런 경쟁 격화는 필연적으로 기존 체제를 붕괴시킬 것이다. 

이미 현대차는 중국에서 비싸다는 이유로 판매가 급감하고, 한국에서도 비싼 차란 비판에 판매량 감소를 겪고 있다. 

더 큰 변화는 소비자의 인식이다. 

소비자들은 푸짐한 임금 상승이 반영된 거품 낀 가격에 더는 현대차를 사지 않겠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다시 월마트로 돌아가 보자. 월마트 경쟁력이 전 같지 않다. 월마트의 대량 구매 경쟁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월마트가 지금 방식대로는 아무리 제조업체들을 닦달해도 가격을 낮추는 데 한계가 있다. 

새로운 강자는 아마존과 알리바바다. 아마존, 알리바바는 아예 유통 단계를 없애고 직거래를 하니 경쟁력이 더 높다. 

닦달해도 얻을 게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그게 바로 위기다. 

현대차 노조가 위기라는 것도 이와 유사한 조건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누울 곳을 보고 발을 뻗으라고 했다. 

자동차 만드는 경쟁력이 적어도 국내에선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분석은 엄포도, 엄살도 아니다. 

현대차 직원의 임금이 도요타, 폴크스바겐보다 높지 않은가. 

지금 경제 민주화 등의 목소리는 자본주의가 또 한 번의 진화를 해야 한다는 요구다. 

진화는 사측만 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근로 조건 향상을 위한 노조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노조도 상황에 맞게 진화하지 않으면 그 순기능마저 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