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명의 전문가보다 다수의 대중이 더 쓸모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게 어디 요리뿐일까. 우선 떠오르는 건 2000년대 초 첫선을 보인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다. 독자와 저자의 구분 없이 누구나 글을 올리고 고칠 수 있다는 낯선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땐 다들 “그게 되겠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잡음에도 위키피디아는 살아남았고, 집집마다 책장 한편을 묵직하게 차지했던 ‘○○대백과사전’류는 실종된 지 오래다.
참여형 콘텐트로서의 가치가 빛을 발했기 때문일 게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2005년 7월 7일 런던 폭발 사건’이다. 출근길 런던 지하철에서 폭탄이 터지자 불과 몇 분 후 위키피디아에 다섯 문장 분량의 글이 처음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어진 4시간 동안에만 이 글은 1000번 이상 수정, 보완됐다. 초기엔 전압 이상으로 추정됐던 사고가 자살폭탄 테러로 밝혀지는 과정에서 각종 뉴스의 링크는 물론 가족을 찾는 사람들, 집에 돌아갈 방법을 묻는 이들을 위한 갖가지 정보가 속속 추가된 거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천재의 통찰에서 대중의 지혜로 이동했다!”(제임스 서로위키 『대중의 지혜』) 이런 선언이 터져 나온 게 바로 그 즈음이다. 오만과 타성에 빠져 있던 전문가 집단에 바야흐로 위기가 닥친 거다. 나를 비롯한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엔 언론이 보도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뉴스가 결정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자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모든 현장에서 누군가는 스마트폰과 SNS를 도구로 뉴스를 생산하는 시대다. 촛불집회마다 페이스북에 넘쳐났던 1인 생중계를 떠올려 보시라. 혹여 모든 방송사가 작정하고 TV 화면을 예능과 드라마로 도배했다 한들 이 뉴스를 묻을 수가 있었겠나. 유례없는 비폭력 평화 시위가 이어진 것도 이들 시민 기자가 언론 못지않게 감시 기능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란 후문이다.
이처럼 달라진 세상에서 기자로 살아남는 길은 겸허히 대중의 도움을 구하는 것뿐일 터다. 정치 역시 다를 리 없다.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난 요즘, 세계 곳곳에선 정책의 입안과 결정을 시민들에게 위임하는 다양한 실험이 진행 중이다. 아이슬란드의 경우 이미 2010년에 무작위로 뽑힌 시민대표와 SNS에 드러난 일반인의 아이디어를 모아 헌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세계 최초의 일이다. 지난해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선 누구나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열기도 했다. 여기서 유권자 2%의 동의를 얻은 제안은 무조건 주민투표에 부쳐지고 과반의 동의를 얻으면 실제로 입법화된다. 소수의 정치인에 기대는 대신 다수의 시민이 직접 해법을 찾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우리 대통령은 단 한 사람의 머리에 의존해 국정을 운용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시대착오의 극치다. 물론 집단 지성의 힘을 빌릴 때도 엄연히 주의할 점이 있다. 거짓과 조작, 쏠림이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각국에서 시민 참여가 확대되는 건 그 정도로 제도권 정치가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물론 짜고 치는 패거리 정치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는 우리로선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그 분노에 찬 외침에.
신 예 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