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조선족 사학자 전정혁과 우리가 잊고 있는 조선인 이야기
만주 벌판을 누비며 독립 위해 목숨 바친 그들
양세봉… 이홍광… 동료들 대신 죽은 조선인 여전사들
광개토왕을 외치고 만주땅을 논하는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배달학교 이야기
1920년 11월 3일 중국 길림성 통화현 반라배촌에 있는 배달학교에 일본군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만주 주둔 일본군이 조선인 박멸을 목표로 펼친 경신대토벌 작전의 일환이었다. 교직원 일곱 명은 통화현으로 가는 길목 환희령 고개에서 나무에 묶여 총과 칼로 살해됐다. 배달학교는 이시영, 이회영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지원으로 문을 연 민족 교육의 본산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교장 김기선을 비롯해 모두 조선인이다.
양세봉 이야기
1934년 9월 18일 밤 반라배 남쪽 요령성 환인현에 있는 항일무장투쟁 조직 조선혁명군 주둔지에 일본영사관의 조선인 밀정 박창해가 보낸 첩자 아동양이 찾아왔다. 아동양이 사령관 양세봉을 옥수수밭으로 유인한 뒤 사라지고, 옥수수 더미 속에 숨은 일본군이 총을 난사했다. 가슴에 3발을 맞은 양세봉은 다음 날 죽었다. 일본군은 며칠 뒤 다시 찾아와 가매장한 양세봉 시신을 꺼내 작두로 목을 잘라갔다. 서른아홉 살이었다.
이봉선과 안순복
1938년 10월 10일 흑룡강성 목단강시 강변에서 중국 항일 조직 동북항일연군 100여명이 일본군 1000여명에게 쫓기던 중이었다. 목단강변까지 몰린 다른 병사들이 도강에 성공했지만 여군 8명은 그러지 못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강을 다시 건너오려는 동료들을 말리며 여군들은 탄환을 소진하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일본군이 난사하는 기관총에 여군들은 강에서 떠오르지 못했다. 동료들은 무사히 후퇴했다. 그 가운데 2명 이름은 안순복과 이봉선이다. 조선인이다. 우리들 가운데 이들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조선인, 조선족
중국 공산당이 나라를 통일하고 3년이 지난 1952년, 길림성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됐다. 이후 중국에 사는 '재중 동포'에게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부여됐다. 이전에 사람들은 조선민족 혹은 조선사람(朝鮮人)이라고 불렀다.
전정혁(全正革)은 바로 그 조선족이다. 1950년에 중국 랴오닝성 신빈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름은 전병균(全秉均·1905~1967)이다. '조선인' 아비는 독립운동가였고 '조선족' 아들은 사학자다. 이 조선인들이 만주 벌판에서 행한 독립투쟁과 조선족들이 기록한 그 투쟁사에 대해 우리들은, 무지(無知)하다.
광개토왕릉비, 장군총, 장수왕릉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에서 서남쪽으로 차량으로 여덟 시간을 가면 집안현이 나온다. 고구려 수도였던 그 집안이다. 집안을 제외하면 고구려 역사는 이해할 방도가 없다. 백두산을 찾은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먼 길을 남하해 집안을 찾는다. 역사에 대한 이성적인 호기심이기도 하고, 고대 국가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편입시켜 버린 동북공정 작업으로 인해 집안시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광개토왕릉비는 강화유리로 사면이 봉쇄된 비각 속에 서 있다. 비석은 마모가 심하다.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몇 없다. 그럼에도 비각 속에서는 그 어떤 촬영도 금지다. 동아시아 3국 고대사를 두고 세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 중인 현실을 말해준다.
발해가 요나라에 패망하고, 고려가 조선에 패망한 이후 만주는 오래도록 잊혔다. 성리학과 중화주의에 매몰된 조선 지식인들은 이 비석을 금나라 비석으로 알고 있었다. 가보지도 읽어보지도 않고 남의 나라 비석으로 알아버렸다. 20세기 비석을 알아본 일본이 냉큼 자기네 식으로 읽어버렸다.
한국과 일본이 논쟁에 빠져 있는 동안, 실질적인 점유자 중국은 역사를 만들어왔다. 광개토왕릉으로 규정된 돌무덤 석실은 텅 비었다. 시주함이 앉아 있고 유리문 셔터는 떨어져 있다. 한 나라 왕릉이 돈을 바라는 토속 신앙 시주단지로 전락해 있다.
광개토왕릉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장수왕릉이 있다. 주인 없는 장군총(장군이 묻힌 큰 무덤)이라 불리던 이 큰 돌무덤을 중국은 장수왕릉으로 확정을 지어버렸다. "시대적으로 이 정도 대규모 무덤을 만들 사람은 장수왕뿐"이라는 주장이 주된 이유다. 당제국 시대 지방정권 군주의 왕릉. 조선 지식인들과 대한민국 지식인들이 무관심과 논쟁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전정혁이 말했다. "이렇게라도 보존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냐"라고.
조선족 사학자 전정혁
전정혁은 학생 때 전공이 아코디언이었다. 첫 직장인 만주족문화관에서는 아코디언으로 만주족 민요를 연주했다. 싫었다. 나이 열넷에 3·1운동을 경험하고 만주로 건너온 아버지로부터 귀 닳게 들은 말이 민족이고 조선이었다. 전정혁이 말했다. "그래서 자전거 타고 요령성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조선 민요를 채집했다. 그런데 노인네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독립군'이며 '싸우자' 따위 단어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이 노인들 죽기 전에 역사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녀딸 피아노 사주겠다고 할머니가 모아둔 중국돈 5000위안이 만주 벌판에 사라졌다. 그 세월이 40년이다. 그 세월 동안 찾아낸 만주 벌판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배달학교 교사들이요 사령관 양세봉이다.
배달학교, 양세봉
1920년 그날 환희령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참극을 목격한 중국인 주민에 의해 마을로 즉각 알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뒷산에 이들을 묻었다. 76년이 지난 1996년에야 전정혁의 발품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 묘소가 정비되고 '반일지사지묘' 비석이 세워졌다.
양세봉은 어찌 되었는가. 1961년 북한 정부는 환인현에 묻혀 있던 양세봉의 시신을 가져가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 이듬해 대한민국 정부도 양세봉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가묘를 만들었다. 남과 북이 함께 인정한 드문 애국지사다.
전정혁은 요령성 왕청문에 있는 화흥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사령부가 있던 자리다. 역시 노랫말 수집을 하며 양세봉을 알게 된 그가 주도해 이 화흥중학교 운동장에 양세봉 장군 석상이 건립됐다. 지난 28일 교육부가 공개한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양세봉의 행적이 소개돼 있다.
2016년 겨울, 통화현 열사릉원
열사릉원 입구 왼쪽에는 연군을 이끈 부대원 동상이 서 있다. 그 맨 오른쪽에 여군이 장총을 메고 서 있다. 털조끼에 한복, 두툼한 버선과 군화. 조선 여자다. 전정혁이 말했다. "간도를 포함해 동북쪽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한 조직은 거의가 조선인이 주도했다. 저 여자를 보라. 내 할머니, 당신 할머니가 아닌가."
나라가 힘들 때면 대한국인은 고구려를 이야기한다. 만주를 이야기한다. 기상과 호연지기를 이야기한다. 다시 자문해본다. 아득한 옛날이 아니라 100년도 되지 않은 그때 그 만주에서 벌어진 일들, 그 역사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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