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시론] 국민과의 역사 교과서 약속 지켜라

바람아님 2016. 12. 4. 05:15

(조선일보 2016.12.03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역사학)


국정 역사 교과서 미흡하지만 북한의 역사 왜곡 추종 않고 계급투쟁 사관 없는 장점 지녀

우선 내년부터 일선에서 쓰고 검·인정 통한 질적 향상은 장기적 과제로 도모해야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역사학

지난 1년 동안 논란이 거듭됐던 국정 중·고교 역사 교과서 현장 검토본이 드디어 공개되었다. 

내용은 일부가 주장했듯이 편향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평이지만 한편에서는 이 책을 아예 

사산(死産)시키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 교육부도 눈치 보기에 급급한 듯하다. 

'대한민국 수립'이냐 '정부 수립'이냐, '건국'이냐 '광복'이냐, 상식적으로 볼 때 같은 말을 두고 

왜 이리 야단법석인가? 벌어 먹고 살기에 여념 없는 일반 국민은 의아하고 짜증스럽기만 하다.


바스티유 교도소가 무너진 7월 14일이 되면 프랑스인들은 삼색기(三色旗)의 물결 속에서 국민 잔치를 

벌인다. 미국의 국경일인 7월 4일 독립기념일에는 마을마다 온통 성조기로 뒤덮이는 각종 각색의 축제를 벌이고 

나라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을 기리고 격려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우리도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에는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독립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하나 됨을 다짐하고 자축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40년 가까운 나라 없는 고난에서 벗어나 신생 민주국가의 국민이 된 1948년 8월 15일조차 

기릴 줄 모르는 의식 없는 국민이 되었다. 1919년 임시정부 선포가 곧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는 억지 주장이 정치인이나 

언론인뿐 아니라 이른바 역사학자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퍼지고 있는 형편이다. 

국민이 이미 하나가 아니고 갈래갈래 찢기고 있음을 드러내는 이보다 더 뚜렷한 증거가 있을까?


역사 교과서는 새 세대에게 지나온 삶이 어떠했는가를 이야기해 줌으로써 배울 것은 배우고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방편이다.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 그 인과관계를 설명해야지, 미화도 폄훼도 도움이 안 된다. 

다만 권선징악의 원리 터득뿐 아니라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감수성과 공동체 의식과 애국심 함양, 미래에 대한 희망찬 

포부를 갖게 해 주는 것이 역사 교육의 궁극적 목표인 만큼 자국의 역사를 긍정적인 눈으로 보게끔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 들어가는 내용은 기성세대에 이미 상식화된 주요 지식으로 충분하지 학술 논쟁의 첨단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우리의 역사 교육에서는 이런 상식이 깨진 지가 오래다. 

역사를 정치 도구화하려는 유혹과 교육 당국의 관료적 경직성, 민주화 투쟁에 청춘을 희생했던 지식인 집단의 지적 결손과 

과잉된 정치적 욕망 모두가 역사 교육 파행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대한민국은 태어날 때부터 

그 성립을 방해하려는 적(敵)들, 곧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노리는 공산주의 세력과 대내외적으로 힘을 겨루며 살아왔으며 

그들은 왜곡된 역사를 선전·선동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데 스탈린 같은 달인(達人)이라는 사실에 있다.


역사 뒤집기는 민주화 투쟁에 몰두하고 있던 386세대에 우리 현대사를 대한민국 국민의 관점이 아니라 북한의 관점에서 

보도록 세뇌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체제 비판 세력이 가장 먼저 파고들어간 영역이 역사 교육이었고, 때마침 정치 민주화와 

발맞춰 추진되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뒤집기'로 역사학계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슬금슬금 변색되며 연결된 것이었다. 일제뿐 아니라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세계 공산화 전략에도 맞서 우리 민족의 

절반만이라도 진정한 독립국가의 민주 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대한민국을 독립시킨 주역들을 모두 '친일·분단·독재' 세력으로 

낙인찍고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 마치 진보의 표상이요, 지식인의 도리인 듯 착각하는 부류가 점차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북한의 선전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교과서는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이 2013년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싼 파동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국정교과서 제도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번 결정은 

검·인정 교과서의 채택이 자유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것을 본 정부가 내린 고육지책이었다.


새로 집필된 국정 역사 교과서는 매끈한 이상형의 교과서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적어도 기존의 대다수 검·인정 교과서와는 달리 대한민국 국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며 북한의 왜곡된 

역사 선전과 시대착오적인 계급투쟁적 역사관에서는 자유롭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교육부는 국민과의 약속대로 

내년부터 새로 만든 국정교과서를 교육 현장에서 사용하게 해야 한다. 검·인정제도의 부활을 통해 교과서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그러나 이번에 새 교과서로 현행 검·인정 교과서를 대체하는 것을 미룬다거나 

신구 교과서 혼용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평화통일에 대한 국민적 염원을 악용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대한민국부터 무너뜨리려는 검은 세력에 대한 백기 투항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