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우리 민족과 여진족의 연관성을 언급한다. 그는 "건주여진(남만주 일원의 여진족)의 추장 노추(奴酋·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고려 왕씨의 후손이라고도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은 지봉 이수광이 세 차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얻은 국제적 견문과 폭넓은 학식을 바탕으로 1614년(광해군5년)에 간행했다. 20권 10책으로 이뤄져 있으며 천문, 지리, 제국, 경서, 문자, 문장, 인물, 언어, 잡사, 식물, 조류 및 곤충 등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비평을 소개하면서 17세기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교양을 집대성했다. 프랑크와 잉글리시 등 서구문명을 소개하며 가톨릭 교리와 교황에 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대마도를 다스리는 태수도 애초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대마도는 종씨(宗氏)들이 태수를 지냈는데 그들의 조상은 우리나라 송씨(宋氏)였지만 그가 대마도에 들어가 성을 종(宗)으로 고쳤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마도 태수 종성장(宗盛長)을 멸하고 종씨 집안의 후손인 종의지(宗義智)를 대신 태수에 앉힌 뒤 평씨(平氏) 성을 하사했다. 도요토미 덕분에 태수가 된 평의지(平義智)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선봉을 맡아 우리나라를 침략한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력가를 형성한 인물도 많다. 지봉유설은 여러 책을 인용해 임정태자(臨政太子·성왕의 아들 임성)가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방주(周防州·규슈 후쿠오카현)에 도읍을 정하고 오우치노도노(大內殿)라고 칭했다고 기술한다. 47대가 지나 임정태자의 대가 끊어지자 그 집안의 신하였던 모리씨(毛利氏)가 땅을 물려받았다. 모리 집안의 후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의 핵심 장수로 조선에 쳐들어와 진주성 전투, 울산성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풍속은 다른 왜인들과 달리 너그럽고 느려서 우리나라 사람의 기상이 있다고들 한다고 책은 서술한다.
중세 동아시아 최대 전쟁인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중국 등 3국과 다양한 인종이 참전한 세계대전이었다. 흑인도 이 전쟁에 참가했다.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의 군대는 다국적군으로 구성됐는데 그의 군사 중에는 흑인도 포함돼 있었다. 이수광은 남번(南蕃)이라는 지역 출신의 해귀(海鬼)를 거론한다. 그는 "해귀의 낯빛은 매우 검어서 옻칠을 한 것 같았으며 얼굴은 귀신 모습이었다. 형상과 체구가 커서 거의 두길이나 되어서 말을 타거나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조선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수광은 임란 때 방어사의 종사관 신분으로 경상도에 갔다. 경상도 군사는 평상시 10만명에 달했지만 그들 모두 흩어져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었다. 여러 날을 두고 군사를 불러모아 겨우 수백 명의 보병만 소집할 수 있었다. 이수광은 "고려 때 홍건적 14만명이 압록강을 건너 개경을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은 각도의 군사 20만명을 합쳐 이들을 평정했다"고 소개하며 "지금 조선의 국력은 임진년에 비할 만한 정도도 못되니 한심한 노릇"이라고 탄식했다.
한양에 거주하는 인구는 겨우 수만 호에 불과했다. 조선을 개국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을 때 겨우 8000호가 살았고 전성기에도 8만호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임란 이후 수만호 로 크게 줄었다. 한나라의 수도였지만 10만~20만명 남짓의 인구가 서울에 모여살았던 것이다. 고려시대 개성만 하더라도 민호가 13만호이나 됐다고 이수광은 비교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흰옷을 즐겨 입는 민족, 즉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붉은색을 주로 착용했다. 조선 초기에는 오히려 흰옷 입는 것을 금지하고 단속하기도 했다. 관리는 물론 관직이 없는 선비들도 나들이할 때에는 붉은색 외투를 입었다. 계림지(鷄林志)에도 "고려 사람은 옷감에 물을 잘 들였다. 붉은빛과 자줏빛 물을 더욱 잘들인다"고 했다. 그러던 것이 명종 20년(1565) 이후 국상을 여러 번 치르면서 흰옷을 계속 입게 되면서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수광은 "온나라 안이 모두 흰옷을 걸치고 있으니 중국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온천의 나라였다. 경기도와 전라도를 제외하고는 온천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면 이 가운데 가장 효험이 높은 온천은 어디일까.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온천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았다. 눈병을 앓았던 세종대왕은 내시에게 명하여 전국의 온천물을 길어오도록 했다. 이를 저울에 달아보니 이천의 갈산온천물이 가장 무거웠다. 함유물이 제일 많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세종대왕은 몸소 갈산온천에 행차해 목욕을 하였더니 실제 좋은 효험이 있었다. 이후 갈산온천을 최고로 쳤다.
명산인 금강산의 이름은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고려국에 태어나서 몸소 금강산 보기를 원한다"는 중국 시구절이 이를 잘 입증한다.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도 금강산의 멀고 가까움을 물었다.
한사군(漢四郡)이 요동에 위치했느냐, 아니면 한반도에 위치했느냐는 조선 중기에도 논란이었다. 지봉유설은 "낙랑은 평양, 임둔은 강릉, 현도는 함경도 땅"이라면서 "진번은 오늘날 자세한 위치를 모르는데 두우(杜佑·당나라 현종 때의 역사가)의 통전(通典)은 진번이 마땅히 요동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말한다.
대개 조선의 학자들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못한 점을 나열하는데 이수광은 우리가 중국인보다 잘하는 점 네 가지를 상술했다. 첫 번째는 부인네가 절개를 지키는 점이다. 미천한 사람도 장례의식을 치르는 것은 두 번째 잘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소경이 점을 잘치는 것, 네 번째는 무사들이 활을 잘 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만 산출되고 중국에 없는 물품으로 경면지(반들반들하고 윤택이 나는 종이), 황모필(족제비 털로 만든 붓), 화문석(꽃돗자리), 양각삼(인형을 닮은 인삼) 등 네 가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수광이 베이징에 갔을 때 베트남과 유구국 사신들은 "귀국의 붓과 먹은 세상에서 뛰어난 품질이니 얻기를 원한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급제한 것을 '소년등과(少年登科)'라고 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에 급제한 사람은 박지, 곽간으로 18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 중 박지는 장원급제까지 했다. 이들을 포함해 적잖은 이들이 20세 이전에 등과했다. 그렇지만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은 한음 이덕형(20세 때 합격) 등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수광은 "젊은 시절 대과에 급제하는 것은 불행이라 한다"고 했다.
기이한 현상도 책은 다수 담는다. 명종 19년(1564) 한강에 불가사의한 생물이 출몰했다. 크기가 돼지만 하고 빛깔은 희며 길이가 한길은 넘었다. 머리 뒤에 구멍이 있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동물은 그러나 중국에서 해돈(海豚)으로 부르던 돌고래였다.
▶이수광(1563~1628)=호는 지봉.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했으며 23세 때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28세(1590년), 35세(1597년), 49세(1611년) 때 사신단 일행으로 베이징을 다녀왔다. 우리 나라 최초로 가톨릭과 각종 서양 문물을 소개해 실학의 선구자가 됐다. 베이징에서 베트남 사신들과 교유해 베트남에 그의 시문이 널리 퍼졌다.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내다가 1613년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가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나 '지봉유설'을 간행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관직으로 나갔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해 이조판서가 됐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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