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2.17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표현은 예전부터 여러 책·교과서에 나와
臨政 부정·親日 옹호로 몰아가는 일부 학계·언론의 자기기만은 지적인 진실성 결여한 행태
역대 교과서부터 보고 비판하라
한국의 지식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
논쟁을 하다가 자신이 틀린 것을 알게 되어도 승복하지 않는다.
진정한 학술 토론도 이뤄지기 힘드니 지식 사회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나 추종 세력이 많은 사람이 틀린 얘기를 하면 지적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학술회의에 단체로 몰려와 근거 없이 고함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요즘 온갖 단체·언론·방송에서 갑자기 국정교과서 공개본의 대한민국 '수립'이란 단어를 불경한 표현이라고 매도한다.
'건국'보다는 약하고 중립적인 이 표현이 '친일 세력 옹호'니 하는 무시무시한 단어로 둔갑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문제는 한국 사회 병리 현상의 일단을 잘 보여주고 있기에 세밀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승만 박사가 1948년을 건국 또는 대한민국 수립이라 얘기한 적이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물론 이승만은 1919년의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을 여러 번 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와 제헌의회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 기념일로 명명했고 거기에 따라 1949년 8월 15일
'제1회 독립 기념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으며 이승만은 기념사에서 "오늘은 민국(民國) 건설 제1회 기념일"이라 언급했다.
그런데 그해 6월에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회부됐고, 4대 국경일인 3·1절, 헌법 공포 기념일, 독립 기념일,
개천절 중에 헌법 공포 기념일을 '제헌절'로 바꾸고 독립 기념일을 '광복절'로 바꾸는 수정안이 9월에 통과되면서
독립 기념일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4대 국경일을 절(節)로 통일하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1950년 8월 15일에는 제2회 광복절 기념식을 거행했고, 1951년 8월 15일에는 제3회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됐다.
며칠 전 있었던 한 학술회의에서 이러한 얘기를 들은 어떤 교수는 회의가 끝난 후 "그런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필자에게 얘기했다.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면 되지 근거도 대지 않고 그냥 못 믿겠다고 한다.
차라리 "믿기 싫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했을 것이다.
교과서의 대한민국 수립이란 문구가 3·1운동과 임시정부·독립운동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라며 무차별적으로 비방하는
일부 학계와 언론의 행동은 더 해괴하다.
일단 대한민국에서 이런 것들의 소중한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러한 가치를 부정한다는 전제 자체가 틀린 것이다.
먼저 교육부가 2015년 9월에 '2015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을 확정할 때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의 사용을 예고했는데
지금 와서 갑자기 이 용어를 가지고 논란이 일어나는 것이 의아하다.
더군다나 국정교과서 공개본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됐다'는 문장이 도대체 어떻게
임정을 부정하고 친일 세력을 옹호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공개본의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더 중요한 사실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이란 단어는 이미 예전부터 교과서와 여러 책에 계속 써왔던 용어이다.
일각에서 우려하는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은 건국절 논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인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도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성립'이라 서술하고 있고,
1948년설을 가장 격하게 부정하는 이만열 교수도 자신이 편찬한 '한국사연표' 290쪽에 그날을 '대한민국 수립 선포'라고
명확히 표기했다. 교과서를 보자면 1차와 2차 교육과정에서도 이 단어는 압도적으로 많이 채택됐었다.
3차부터 6차까지의 국정교과서에서도, 7차 교육과정 한국 근현대사 검인정 교과서 6종 중 4종에서,
2011년부터 시행된 개정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6종 중 3종, 현행 교과서 중에서도 비상교육출판사 간행본에
'대한민국의 수립'이라 서술됐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과서들과 책들은 '임정을 부정하고 친일 세력을 옹호'한 사람들인가?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인가 아니면 지적인 자기기만에 빠진 것인가.
일부 역사학계와 정치권의 자가당착적 주장과 여기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일부 방송·신문들은 깊이 반성하고
명확한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한국 좌파가 맹종하는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조사하지 않으면 발언하지 마라."
어느 사안에 대해서건 조사하지 않아 잘 알지 못하면 발언하지 말란 경구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 수립'이란 단어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지적인 진실성을 결여한 사람들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역대 교과서들과 관련 책들을 찾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비판한 사람들은 마오쩌둥의 경구를 마음에 새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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