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명성황후 사진의 실체 밝혀질까

바람아님 2016. 12. 18. 23:36
[중앙일보] 입력 2016.12.18 15:42

명성황후 삽화와 장례식 기사 실린 118년 전 미국 신문 발굴
헐버트 박사가 1898년 1월 9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기고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 19일 국제학술회의서 공개 예정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공개한 8종 사진 중 명성황후 숭모제전 준비위원회에서 1백주기를 맞아 복원한 명성황후도.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공개한 8종 사진 중 명성황후 숭모제전 준비위원회에서 1백주기를 맞아 

복원한 명성황후도.


명성황후 사진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이번엔 풀릴까. 1895년 10월 8일 일제의 만행으로 경복궁에서 피살된 비운의 명성황후(1851~1895). 장례식도 바로 열리지 못하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897년 11월 21~22일 열렸다. 그 장례식 소식을 전하는 118년 전 신문이 발굴됐다.

1898년 1월 9일자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이다. 장문의 기사와 함께 명성황후의 삽화가 실려 있다.

이 기사를 쓴 이는 바로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존경을 표했던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다. 우리나라 첫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1886년에 초빙돼 온 인물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추진한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이 신문을 발굴한 이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 저자)이다. 김 회장은 1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YMCA 대강당에서 '헐버트 박사 내한 1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이 신문과 명성황후 삽화를 공개할 예정이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명성황후 사진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이번에 발굴된 삽화는 1893년 프랑스 월간지 '피가로 일루스트레'(10월호)에 실린 사진과 유사하다. 여행작가이자 기자인 게르빌이라는 프랑스인이 조선의 풍물과 왕실의 모습을 10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이 사진에 "민, 조선의 황후(Min, Roi de Coree)"라는 설명이 달려 있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진이 명성황후 사진으로 널리 공인받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을 소개하는 다른 책자와 사진집 등에도 이와 같은 사진이 나오는데 대개 궁녀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1891년 미국에서 발간된 국립박물관 보고서, 1893년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테크가 쓴 『코레아』(독일어판), 1894년 영국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 등에 궁녀로 표기돼 있다. 지금까지 이 사진을 누가 언제 찍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가운데 대개 명성황후가 아니라고 보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다.

이번에 발굴된 삽화로 인해 상황이 좀 달라졌다. 이 삽화에도 "시해된 한국의 황후(The Corean Empress Who Was Murdered)"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특히 기사를 쓴 헐버트가 고종황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한국말도 잘했기에 명성황후의 얼굴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부터 고종황제를 지키기 위해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3인1조로 함께했다. 고종은 격통과 공포 속에 식음을 제대로 못하고 미국인들이 보내 준 식사만 들었던 때다. 심지어 음식을 담은 상자에 자물쇠를 잠가 고종에게 전달했다고 헐버트는 회고한 바 있다. 일제가 음식에 독을 넣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당시 유일한 영문 월간지였던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 1895년 10월호, 11월호에 잇따라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상세히 전하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국소식'은 헐버트와 아펜젤러 등 감리교 선교사들이 공동 운영했다.

헐버트가 명성황후 장례식 소식을 서울에서 기고한 것은 1897년 12월 8일로 기록돼 있다. 그에 따르면 장례식은 이틀에 걸쳐 성대하게 치러졌다. 궁궐에서부터 동대문 밖 홍릉에 이르는 장례 행렬을 스케치하고 있다. 헐버트는 "황제는 하관과 봉분 작업을 직접 지휘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황제와 세자는 외국인들을 직접 만나 감사를 표하였다"고 전하면서 "외국인들은 이러한 특이한 장례의식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나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또한 황제가 황제로서의 의무를 멋지게 수행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헐버트가 명성황후 삽화까지 직접 제공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삽화가 명성황후의 초상을 재구성하는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헐버트는 한국 관련 15권의 책과 200여 편의 글(논문ㆍ신문 기고)을 남겼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뒤 조선과 조약을 맺은 외국들이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고 그는 "서양문명의 한계이자 슬픈 역사"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도 그 실체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는 듯하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명성황후 진짜 얼굴 밝혀지나


 중앙일보 2016.12.19 00:56

 

장례식 전한 118년 전 미 신문 발굴
고종과 친했던 헐버트 박사가 필자
황후 삽화, 궁녀 논란 인물과 닮아
       
명성황후 사진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이번엔 풀릴까.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피살된 비운의 명성황후. 장례식도 바로 열리지 못하고 2년 후인 1897년 11월 21~22일에야 열렸다. 그 장례식 소식을 전하는 118년 전 신문이 발굴됐다. 1898년 1월 9일자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이다. 장문의 기사와 함께 명성황후의 삽화가 실려 있다.

명성황후 장례식을 보도한 1898년 1월 9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사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기사를 쓴 이는 바로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존경을 표했던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 박사다. 우리나라 첫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1886년에 초빙돼 온 인물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추진한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이번 기사를 발굴한 이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이다. 김 회장은 1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YMCA 대강당에서 ‘헐버트 박사 내한 1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열고 이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명성황후 진짜 얼굴을 알아내려 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이번 삽화는 그중 1893년 프랑스 월간지 ‘피가로 일루스트레’(10월호)에 실린 사진과 유사하다. 여행작가이자 기자인 프랑스인 게르빌이 찍은 것으로 “민, 조선의 황후(Min, Roi de Coree)”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명성황후로 공인받지는 못했다. 조선을 소개하는 당시의 다른 책자들에도 이와 같은 사진이 나오는데 대개 궁녀로 소개되고 있어서다.


그런데 이번 발굴로 상황이 좀 달라졌다. 이 삽화에도 “시해된 한국의 황후(The Corean Empress Who Was Murdered)”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특히 헐버트가 고종황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한국말도 잘했기에 명성황후의 얼굴을 분명히 알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헐버트는 궁궐에서부터 동대문 밖 홍릉에 이르는 성대한 장례 행렬을 스케치했다. 헐버트가 이번 삽화를 제공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초상의 진실을 찾는 실마리는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