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살며 생각하며>소설 '無情' 100년

바람아님 2017. 1. 6. 23:29
문화일보 2017.01.06 14:10

최동호 한국시인협회장, 경남대 석좌교수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이광수는 매일신보에 장편 ‘무정(無情)’을 연재했다. ‘무정’은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당시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신문이 귀하던 시절이었던 까닭에 어떤 독자는 왕복 10리 길을 걸어 신문을 구해 보았다고 하고, 또 어떤 독자는 신문이 배달되기를 새벽부터 기다리다가 ‘무정’이 실린 난을 펼쳐 들고 큰 소리로 읽었으며 가족들은 모두 주변에 둘러앉아 들었다고 한다. 어느 날은 목이 메어 큰 소리로 읽을 수 없었다고도 한다. 새로운 시대의 목소리가 그만큼 크고 높게 조선 천지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100년 전이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후일 그의 친일(親日)이 우리에게 정신적 상처를 남겼지만, 그것은 시대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 그의 운명적 한계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광수의 ‘무정’이 20세기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무정’은 이후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결정적인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광수를 비판적으로 논한 동시대의 소설가 김동인은 그 중요성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우리말 구어체로 이만큼 긴 글을 썼다는 것은 조선문(朝鮮文) 발달사에 있어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둘째, 새로운 감정이 포함된 소설의 효시로서도 ‘무정’은 가치가 있다. 셋째,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환영받은 소설로서 가치가 있다. 넷째, ‘무정’은 춘원의 대표작인 동시에 조선의 신문학이라 하는 대건물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다.”


이런 지적은 지금의 시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많지만, ‘무정’은 동시대에 분출된 거의 모든 사회적 문제를 머금고 있다. 주인공 이형식을 정점으로 박영채와 김선형이 그린 애정의 삼각관계는 소설적 흥미를 자극하면서 전근대와 근대를 잇는 과도기적 상황을 실감 나게 제시하고 있다. 동학교도 박찬영 대령과 돈 많은 예수교 교인 김 장로가 보여주는 신구(新舊)의 대립은 각기 박영채와 김선형으로 변형돼 나타나며, 이들이 시대적 존재로서 자신을 각성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근대화를 열망하는 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물론 경험한 과거를 그리는 것이 다가올 미래를 그리는 것보다 박진감이 있었을 것이어서, 이광수의 필치는 박영채를 그리는 데 더 치밀했으며, 독자들 또한 김선형보다는 박영채의 생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 독자들의 목이 메었던 것은 능욕당한 박영채가 자살하기 위해 가출했을 때가 아닌가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광수가 모범으로 삼은 것이 일본식 근대화였고,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화를 담보해내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친일의 논리가 거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지난 100년의 한국사를 조망하면 다음 세 가지 단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식민지하의 역사적 굴욕, 둘째, 광복과 근대화의 성공을 통한 한강의 기적 ,셋째, 디지털 정보사회의 성공적 진입으로 인한 민족적 자긍심의 회복 등으로 집약된다. 지금 우리는 세계사적으로 4차 산업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단순한 기술정보 혁명을 넘어서는 초고속 인터넷망에 의한 산업혁명이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공지능과 로봇이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시대이다. 인간과 기계와 정보가 하나가 되어 살아나가야 하는 시대이며, 머지않아 기계가 인간의 영역을 지배할지도 모르는 세상이 된 것이다. 알파고가 승승장구해 세계적인 고수들을 연일 격파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무정’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열광한 최초의 소설이라고도 한다. 종전의 언문 소설은 아녀자들의 소일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며 지식인들이 소설을 읽지 않던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 왜 그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을까. 아마도 당대의 지식인들은 ‘무정’에서 자신들이 걸어나가야 할 미래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식민지 조국에서 해야 할 역사적 사명감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가끔 주변에서 지금의 상황이 100년 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국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그들이 취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적 각축장이 동북아시아의 한가운데 위치한 한국의 지정학적 운명이다. 이광수는 ‘무정’의 말미에서 삼랑진 홍수를 빌미로 외국으로 유학 가는 주인공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아 그들 모두가 후일 조국에 돌아와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한다. 그들은 뜨거운 사명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맹세한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약간 어색함이 감돌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독자의 가슴에 전달했고, 이를 통해 ‘무정’의 미래 지향적 가치는 크게 고양된다.


지금 과연 누가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그렇게 미래를 개척해 나갈 용기와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이런 시각이 이광수의 친일을 긍정하는 논리로 나가서는 안 된다. 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어느 산업혁명보다도 발상의 전환과 비약적 혁신을 요구한다. 낡은 정치적 사고나 사회적 체제로는 수용 불가능하다. 사회 변혁의 측면에서 ‘무정’ 100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전국에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든 전국의 수많은 젊은이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미래를 위한 대혁신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