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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선불장

바람아님 2017. 1. 4. 23:36
중앙일보 2017.01.04 19:52

‘절 아래 맑은 강에는 안개가 자욱하고(寺下淸江江上煙) 그림 같은 산봉우리는 하늘 높이 솟았네(峯密如畵揷蒼天).’ 조선의 다성(茶聖)으로 불린 초의 선사(1786~1866)가 쓴 한시다. 현장을 보니 허풍이 아니다. 산사에서 내려본 한강에서 짙은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뿌연 미세먼지 탓에 절경을 완상할 수 없었지만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새해의 희망가를 띄워 보냈다.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2017년 첫날 경기도 남양주시 수종사를 찾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승지다. 조선 전기 문장가 서거정(1420~88)이 ‘최고의 사찰 풍광’으로 꼽기도 했다. 초의 선사의 시는 대웅전 왼쪽 선불장(選佛場) 기둥에 붙어 있다. 선불장, 말 그대로 ‘부처를 선발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수행·참선 공간을 가리킨다. 요즘 수종사에선 스님의 거처로 쓰고 있다.


 선불장에도 역사가 있다. 중국 당나라 때다. 과거제가 문란해지고 부정 시험이 만연해지자 젊은이들이 절집으로 많이 몰렸다. 관리를 뽑는 선관장(選官場)과 대비되는 승려 자격시험 선불장이 생겼다. 부패한 시대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당대 뛰어난 선승이었던 마조도일(709~788)의 영향이 컸다. 그는 관리보다 부처가 되는 게 값진 일이라고 가르쳤다. 출세나 권력보다 청정심, 즉 깨끗한 마음을 설파했다.


 선불장은 한국에도 전해졌다.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원철 스님도 해인사 계(戒)를 받기 전 선불장에서 2년을 지낸 적이 있다. 그는 “종교나 정치나 지향점은 같다. 자기를 닦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청정의 공간, 정진의 공간인 선불장은 되레 오늘날 의미가 크다”고 했다. 사회 전반의 구태를 씻어내고, 새 체제에 대한 요구가 비등하는 현재의 난국을 풀어가는 출발점은 청정심이라고 설명했다.


 정유년 새해 시민들의 바람도 한결같다. 대한민국을 리셋(reset)할 새 대통령의 조건에 대한 중앙일보의 질문에 유권자의 33.2%가 ‘깨끗함’을 들었다. 한국고전번역원도 올해를 상징하는 한자로 ‘맑을 정(淨)’자를 선정했다. 그다음이 ‘바꿀 혁(革)’이다. 수종사 인근 두물머리에는 개혁사상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가가 있다. 올해 출간 200년을 맞은 국가개조 지침서 『경세유표』의 탄생지다. 다산은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 “부하를 통솔하는 위엄은 청렴에서 나온다”고 했다. 정치인·기업인 등 지도층이 두고두고 가슴에 품을 말이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