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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에게 보낸 편지 한 통
갑진년 섣달 이십육일(1664년 12월 26일), 윤선도의 첫째아들 윤인미의 집에 한글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이 편지는 그의 처남인 유정린이 누나인 전주 유씨에게 보낸 것이었다. 윤인미의 처인 전주 유씨와 형제들은 부모인 유항 부부가 사망하자 부모가 남긴 재산을 협의하여 나누어 가지게 되었고, 이때 화회(和會)문기를 작성하였다. 화회문기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마치고서 자녀들이 모두 모여 합의하에 유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하는 문서다. 이때 상속 대상자는 윤인미의 처를 포함해 적자녀 10명이었다. 유정린은 직접 화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손위 둘째누이에게 제반 사정을 알려주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보통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담제를 지내고 나면 부모의 재산을 분배하지만, 전주유씨 집안에서는 불행하게도 일곱 번째 동생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 바람에 동생의 담제를 끝낸 후 비로소 부모의 재산을 나눠 갖게 되었다. 이 편지에는 분재를 통해 10남매가 나눠 갖은 몫뿐만 아니라 앞으로 10남매가 맡아야 할 돌림 제사에 대한 내용, 그리고 이것의 비용 충당 문제 등이 적혀 있었다.
◆전주 유씨 10남매는 어떻게 부모 재산을 나누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17세기 중엽까지 균분(均分)상속을 고수했다. 부모가 남긴 재산을 장남이나 차남, 아들, 딸에 관계없이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균분은 양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한다. 노비는 수와 나이, 토지는 결부와 두락, 비옥도 등을 엄밀히 따져서 똑같이 나눴다. 부모가 죽기 전에 미리 재산을 상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편지에서처럼 부모가 죽은 이후에 자식들이 모여서 부모의 재산을 나누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분재 방식을 ‘화회(和會)’라고 하고 이때는 상속 내용과 그 취지를 명확하게 밝힌 ‘분재기’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서로 나누어 가졌다.
윤인미의 처도 이 분재의 현장에 마땅히 참여해야 하지만, 해남이라는 먼 타지에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친정까지 가서 참여하지 못하였다. 동생 유정린은 누이의 이러한 사정을 살펴서 분재의 제반 사정을 편지에 적어 보낸 것이다. 이 당시 분재의 대상은 집, 소나 말, 생활용품(솥이나 농기구 등)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분재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노비’와 ‘토지’였다.
1664년 유정린이 윤인미의 처 전주 유씨에게 보낸 편지. |
◆출가한 딸은 친정에서 얼마의 재산을 받았을까
윤인미의 처가 상속받은 토지는 ‘강화도의 논밭, 양주 증조부 묘소에 딸린 전답, 충주의 나절갈이의 밭, 새순막 묘소에 딸린 나절갈이의 하전, 검암에 있는 땅’이다. ‘나절갈이’는 한나절 동안에 갈 수 있는 밭이나 논의 넓이를 뜻한다. 그리고 노비는 도망간 여자 노비 1명과 결혼할 때 이미 받은 신노비를 포함하여 여자 2명과 남자 6명을 받았다.
윤인미의 처는 10남매 중 유일하게 이미 부모 생전에 두 번이나 별급을 받았다. 별급은 부모가 생전에 과거급제, 혼인, 자식탄생, 효도 등의 특별한 사유가 발생했을 때 기쁜 마음에 상으로 이루어지는 상속이다. 윤인미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을 때 장인 장모로부터 계집종 하나와 사내종 둘을 물려받았고, 과거에 급제했을 때는 사내종 셋을 특별히 받았다. 이러한 상속은 평균 상속분에 포함되지 않았다.
◆팍팍한 형편의 동생에게 누이의 몫을 양보함
동생 유정린이 누이에게 이 편지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유정린의 팍팍한 형편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신노비로 받은 노비들이 죽고 달아나고 해서 영 제 몫을 못하는데 이를 포함해서 분재를 하다 보니 겨우 노비 하나를 더 받았을 뿐이었다. 유정린은 장자이기 때문에 법에 따라 봉사조로 종 둘과 밭 하루갈이와 논 세 마지기를 더 받았다.
그 당시 ‘경국대전’을 보면 적첩(嫡妾)의 소생일 경우 장자, 중자, 딸의 구별 없이 모두에게 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 승중자에 한해서 상속분의 5분의 1을 더해준다. 승중자란 부모 및 선대의 제사를 지낼 의무를 지닌 아들이라는 뜻이며, 적장자를 의미했다. 이 규정에 의해 장자인 유정린이 추가로 받은 몫이라 해도 사당제사에 쓰기조차 적었던 모양이다.
장자인 유정린을 제외한 다른 동생들의 형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여유 있는 누나는 이러한 동생들의 팍팍한 형편을 생각하여 자기의 몫으로 오는 소작료를 제사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이 편지는 이제 부모님 사후에 처음으로 맞는 돌림제사가 임박했으니 전에 한 약속을 확실히 해 달라는 뜻에서 보낸 것이다.
이현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
부모의 재산을 차별 없이 똑같이 상속받았다면 장자 혹은 남자들만이 제사를 맡아 지낼 이유가 없다. 재산을 고르게 상속받은 자녀들은 제사의 의무 또한 동등하게 짊어져야 한다. 자식들이 순서대로 선조 제사 가운데 특정 제사를 맡아 제사의 준비 및 의식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누나인 전주 유씨가 자기의 몫인 소작료를 동생에게 양보하였지만 자식으로서 돌림제사의 의무는 다한 것으로 보인다. 해남 윤씨 연동종택에는 전주 유씨의 동복형제들이 돌림제사를 맡아 지낸 기록들이 남아 있다. 기록을 보면 윤인미의 처는 총 16번의 친정 제사를 모셨다.
조선시대 중기까지 형제들은 똑같이 부모의 유산을 나누고 그 결과에 따라 조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합리적인 상속시스템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형제들이 처한 딱한 형편을 감안하고 형제애를 발휘한 것을 보니 얇디얇은 한 장의 편지가 무겁게 다가왔다. 물론 윤인미의 처가 다른 형제들보다 형편이 나아서 자기 몫을 양보했겠지만 혼인한 이후에도 친정의 제사를 책임지며 어려운 형편의 형제들이 자식의 의무를 다하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곧 다가오는 설날에 집안의 큰일을 의논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이 많을수록 선조들의 합리적인 사례를 참고삼아 현명한 판단에 이르게 되길 바란다.
이현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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