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신병주의 ‘왕의 참모로 산다는 것’] (1) 명가에서 왕조의 설계자로 ‘정도전’-재상 중심의 민본주의 꿈꿨지만 결국…

바람아님 2017. 1. 19. 23:43
매경 이코노미 : 2017.01.16 07:32:03  
 
 

이번 호부터 신병주 교수의 ‘왕의 참모로 산다는 것’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역대 조선 왕을 보좌했던 소위 ‘킹메이커’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을 예정입니다. 신병주 교수는 매경이코노미 1796~1888호까지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을 연재했으며 저서로는 ‘조선과 만나는 법’ ‘조선평전’ ‘키워드 한국사’ 등이 있습니다.




  
 기사의 0번째 이미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년). 건국 후 그의 삶은 극히 짧았지만, 고려 말 혁명을 완성해 새 왕조 건설의 설계자가 된 그의 삶은 킹메이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정도전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성계를 비롯해 이인임, 최영, 정몽주, 이방원 등 선 굵은 다양한 인물이 경합하던 시대다. 이성계를 통해 만들고자 했던 정도전의 삶과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 최대의 공로자다. ‘한고조가 장량(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왕조 건설의 최고 주역임을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다.

정도전은 1342년 정운경과 우씨 부인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재 도담삼봉이 있는 단양 삼봉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의 근거지가 있던 영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부친 정운경은 청백리의 표상으로 ‘고려사’ 양리전(良吏傳)에 수록될 정도로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관리였다. 정도전은 1362년에 과거 시험에 급제해 부친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관리의 길에 들어선다.

정도전은 당대 지성을 대표했던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등과 함께 성리학을 배웠다. 성리학은 고려 말 안향이 처음 원나라에서 들여왔는데 도덕정치, 왕도정치, 민본사상 등은 당시 젊은 학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결과적으로 성리학은 고려 말 권문세족에게 집중된 권력체제의 모순과 불교계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가 된다. 1366년 정도전이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영주에서 여묘살이(상주가 무덤을 지키는 일)를 할 때 정몽주가 보내준 책 ‘맹자’는 특히 정도전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했다. ‘맹자’는 불가피한 경우 역성혁명의 필연성을 강조한 책이다.

정도전이 관직에 들어온 시기, 고려의 왕은 공민왕(1330~1374년)이었다. 공민왕은 왕이 된 직후 호복(胡服)과 변발을 거부하고 반원 자주 정책을 전개하면서 개혁을 실천했다. 개혁의 핵심은 권문세족 척결이었고, 이를 위해 신진 세력인 사대부를 적극 양성했다. 정도전은 공민왕 후원에 힘입어 탄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하지만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인임, 경복흥 등 친원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도전의 정치적 행로도 순탄치 않게 됐다. 정도전은 북원(北元·원이 명나라에 밀려 북쪽으로 가면서 북원이라 칭함) 사신이 오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다 이인임의 노여움을 사 1375년 30대 초반 나이에 나주 거평 부곡으로 유배됐다.

유배 생활은 세상의 모순에 분노를 느꼈던 정도전을 완전히 혁명가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3년간 부곡 민중들과 생활하면서 농민의 참상을 경험했던 정도전은 고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영주와 단양, 북한산 등지에서 야인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함께 바꿀 파트너를 만나는 구상을 하게 된다.

사실 고려 말은 권문세족과 불교 세력의 횡포 못지않게 남방의 왜구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졌던 시기다. 위기 상황도 자주 연출됐다. 잦은 외부의 침략은 무장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됐고 최영, 이성계, 최무선 등이 구국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1383년(우왕 8년) 가을 정도전은 함주 막사로 들어가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장군 이성계를 찾았다. 이성계는 거듭되는 외침 속에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신흥 무인 세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성계를 찾아간 정도전은 그의 휘하 군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성계가 재차 무슨 일이냐고 묻자, 정도전은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이 순간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사력에서 혁명의 성공을 직감했을 것 같다. 1388년에는 이성계가 완전히 군사력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위화도 회군이다. 이성계는 최영의 벽을 넘어 최고 실권자가 됐다. 이성계는 정도전, 정몽주 등 신흥사대부와 협력해 신속히 전제개혁(과전법)에 착수했다. 결국 공양왕의 선위(禪位)를 받는 형식으로 1392년 7월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했다. 조선왕조의 시작이다.

새로운 왕조 건설의 중심에는 늘 정도전이 있었다. 국호와 도읍지 선정 모두 정도전의 주장대로 결정됐다. 1395년에는 새 궁궐이 세워졌다.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이름과 각 전당의 이름을 짓도록 명했다. 경복궁은 물론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각종 전당의 이름도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이란 책을 통해 조선 건국의 이념적 가치를 제시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신하 권력을 강조한 부분이다.

“국왕의 직책은 재상과 의논하는 데 있다.”

건국 이념을 제시한 정도전의 머릿속에는 재상의 권력이 언제든 왕권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정도전의 구상에 가장 강력히 반발한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다. 이들의 갈등은 이미 태조의 후계자인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됐다.

태조의 첫째 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전인 1391년에 55세 나이로 사망했지만 그녀와 태조 사이에는 장성한 아들 6명(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이 있었다. 계비 강씨 사이에서도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방번과 방석이다. 강씨의 영향력은 컸다. 조선 건국 한 달 후인 8월 20일 그녀 소생인 11세 방석을 세자로 책봉시킨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방석의 세자 책봉은 조선 왕실의 비극을 잉태하는 싹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본처의 아들 중 왕위를 계승하리라고 믿었던 한씨 소생 아들들은 방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아버지와 계모, 정도전에게 맞서는 방책들을 구상해나갔다.

자질이 일정하지 않은 국왕이 세습돼 전권을 행사하는 왕권주의보다는 천하의 인재 가운데 선발된 재상이 중심이 돼 정치를 펴는 신권주의를 주장한 정도전은 방석의 세자 책봉을 기회로 여겼다. 방원과 같은 버거운 상대보다는 어린 세자 방석이 즉위하면 자신의 입지가 보다 커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왕자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없애는 조치를 취해 왕자들의 무력 기반을 해체하고자 했다.

자신에게 서서히 가해지는 정치적 압박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방원은 기회를 노렸다. 1398년 8월 이방원은 정도전이 자신의 자택(현재의 종로구청 자리)에서 가까운 남은의 첩 집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술자리를 벌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습격했다. 조선왕조 건설의 최고 공로자 정도전의 최후는 술자리에서 너무도 기습적으로 끝났다.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증오는 그의 수진방 자택을 몰수해 말을 먹이는 관청 ‘사복시(司僕寺)’로 사용한 것에서 얼마나 어마어마했는가를 알 수 있다.

1398년 왕자의 난 성공으로 정도전은 죽고 이방원은 결국 왕으로 즉위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정도전이 주장한 재상 주도의 신권주의가 패배했음을 의미했다. 이방원이 즉위한 후 강력한 왕권주의를 펼쳤던 배경에는 이런 정치적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방원에게 죽은 뒤 정도전은 조선왕조 내내 역적의 오명을 썼다. 400년 이상 지난 정조 대에 이르러 그의 문집인 ‘삼봉집’이 간행되면서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했다. 1865년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왕궁의 설계자였던 그의 공로를 인정해 문헌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실질적인 정도전의 명예 회복은 최근에 와서 이뤄졌다. ‘정도전’과 같은 드라마 외에도 역사, 철학, 문학 등 다방면에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을 이끈 정도전. 건국 이후 그의 삶은 극히 짧았지만 그가 제시한 국가 모델은 500년 조선왕조의 기본 골격이 됐다. 조선왕조가 장수 국가를 이룩한 데는 그의 힘이 매우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다’라고 강조한 그의 ‘민본사상’은 지금, 이 시기 더욱 절실히 와 닿는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91호 (2017.01.11~01.17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