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년).
1897년 10월 20일 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새롭게 면모를 일신하는 상황에서 태어난 아기인 만큼 무엇인가 좋은 징조를 예고하는 탄생이었다. 하지만 끝내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로 남는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순종 황제 뒤를 이어야 할 인물이었다.
영친왕 이름은 은(垠), 아명은 유길(酉吉), 호는 명휘(明暉)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고종의 후궁으로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 추존된 엄씨다. 1900년 영친왕이라는 봉호(封號)를 받았다. 1907년 7월 순종이 황제가 된 후에는 황태자가 됐다. 형인 의친왕이 있었지만 의친왕과 순종의 나이 차이가 거의 없어 좀 더 어린 영친왕이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영친왕의 태자 책봉을 강하게 희망했던 것도 한 요인이다.
영친왕은 황태자가 된 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압력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매천야록’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은이 영민하니 일찍 신학문을 배워야 하며, 일본 황태자의 방한에 대한 답례로 일본으로 가야 한다고 고종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되면서 영친왕은 ‘황태자’에서 ‘이왕세자(李王世子)’가 됐다. 강제병합 후 영친왕은 철저히 일본인의 길을 걸었다. 1911년 일본의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고, 1915년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했다. 1920년 정략결혼에 의해 일본 왕족인 마사코(한국명 이방자)와 결혼해 아들 진을 낳았으나, 이진은 1922년 한국 방문 중에 사망했다.
1926년 순종 승하 후 창덕궁에서 이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7년 5월에는 부인 마사코와 함께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여행을 떠났다. 일본 정부는 이들 부부를 일본의 백작 부부로 위장했다. 조선에 남은 왕실이 있다는 점을 대외에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영친왕이 유럽 여행 때 중국 상하이에 들르는 것을 기회로 삼고 납치 계획을 세웠지만 사전 발각돼 결국 실패했다.
이후 영친왕은 1931년에는 둘째 아들 이구를 낳았고,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해 1940년 12월 육군 중장에 올랐다. 1941년 중국 화베이 전선에 파견돼 1년간 활동했고, 1943년 일본의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복무하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예편됐다. 1945년 해방 후 영친왕은 귀국을 희망했으나 일본과의 국교 단절과 함께 국내 정치 세력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했다.
이후 1947년 일본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왕의 지위마저 상실했다. 그해 10월 18일에는 일본 왕족 명단에서도 제외되고 일본 국적도 잃었다. 1957년 일본 국적을 다시 취득했는데, 아들 이구가 매사추세츠공과대를 졸업하자, 졸업식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 데 여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대한민국 정부에 여권 발급을 요청했지만 발급이 이뤄지지 않자, 결국 일본 여권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정부가 들어서자 대한민국 국적이 회복됐고, 1963년 11월 22일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1907년 일본으로 떠난 지 56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 거처를 잡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 있었으며 1970년 조용히 사망했다. 무덤은 아버지 고종이 묻혀 있는 남양주 금곡의 홍릉 근처에 조성됐다.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는 1901년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1920년 4월 대한제국 황태자 영친왕과 정략혼인을 했다. 해방 후에도 영친왕과 함께 일본에 체류하다가, 1963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영친왕과 같이 귀국해 낙선재에서 지냈다. 귀국 후에는 장애인과 정신박약 아들의 재활을 돕는 사회복지사업에 전념했으며, 1989년에 생을 마감했다.
의친왕(1877~1955년)은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강(堈), 호는 만오(晩悟)다. 고종은 적자인 순종과 서자 5명을 얻었다. 의친왕은 순종 다음 서열이었으나, 동생인 영친왕이 황태자에 책봉됐다.
1894년 9월에는 전권대사로 임명돼 일본을 다녀왔으며 이듬해에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1900년에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의친왕에 책봉된다. 1906년에는 육군 부장(副將)이 돼 고종 황제를 보필했다. 동생인 영친왕이 일본 육군 장성이 돼 철저히 일본인 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의친왕은 1910년 강제 한일합병이 이뤄진 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항일 독립운동가와 접촉하는가 하면, 1919년에는 대동단 간부들과 함께 상하이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安東)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강제 송환됐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으로 올 것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거부하는 등 항일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말년에는 현재의 서울 성북구에 있는 성락원에 거처했다. 성락원은 원래 철종대 세도가였던 심상응의 별장이었다. 이곳에서 79세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옹주(1912~1989년)는 1912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복녕당(福寧堂) 양씨였으며, 고종이 회갑이 되는 해 얻은 귀여운 아기였다. 덕혜 출산 이후 고종은 늘 그녀와 함께했다. 1916년 4월에는 덕수궁 준명당에 다섯 살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다. 하지만 부녀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19년 고종이 덕혜옹주의 나이 겨우 8살 되던 해에 승하했다. 1921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후 10살 덕혜에 대한 교육이 중요 문제로 떠올랐다.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일제는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가하려 했고, 1921년 4월 덕혜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했다. 덕혜의 불운은 일본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영친왕에게 했던 것처럼 일제는 덕혜의 일본 유학을 강요했다.
일제 압박에 굴복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했고, 14세 소녀는 정든 궁궐을 멀리하고 일본이라는 낯선 타국에 도착했다. 이 무렵 덕혜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1926년 순종의 죽음과 1929년 생모 양씨의 죽음이었다.
1931년 5월에는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혼인을 했다. 망국의 옹주로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커서였을까. 결혼 후 정신분열증에 시달렸고, 1945년에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해방 이후 소 다케유키와 합의이혼했다.
이후 덕혜는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원했지만, 이승만정부는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박정희정부 시절인 1962년 1월 26일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온 덕혜는 귀국 후 서울대병원에서 7년간 요양했지만 병세는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 1968년에 궁궐로 들어가 그녀가 마지막까지 머문 공간은 창덕궁 낙선재.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인근 공간에 함께 머물며 말년을 보냈다.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면서.
세상 평지풍파를 모두 겪은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9일 뒤인 4월 30일엔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했다.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태자비와 마지막 옹주는 1989년 같은 해에 생을 마감했고, 조선왕실도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번 호를 끝으로 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은 막을 내립니다. 2017년 신년호부터 신병주 교수가 ‘왕의 참모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새로운 칼럼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88·송년호 (2016.12.21~12.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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