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곽병찬의 향원익청] 벼슬? 코 묻은 떡이나 다투라는 건가!

바람아님 2017. 1. 17. 23:48
한겨레 2017.01.17 18:36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 12월, 3년차 신참 관료(사헌부 지평)였던 그는 선조에게 이런 발칙한 상소를 올린다. “지금 왜적을 물리치는 것이 시급함에도 신하들을 접견하는 경우는 매우 적고 오히려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환관이나 궁첩들 따위랑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서야 쓰겠습니까.”


1620년 광해군은 그를 예문관제학에 임용했지만 그는 출사하지 않았다. 1621년 월사 이정구가 그를 대제학에 추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월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늘날 조정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코 묻은 떡을 서로 먹겠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데, 날더러 코 묻은 떡을 함께 다투라는 것인가?” 1622년 그는 아예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뉘시오.” 채소밭을 가꾸던 노인이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의 제자입니다.” “아, 섣부른 지식으로 성인 흉내를 내고(博學以擬聖), 허망한 말로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於于以蓋衆), …그 사람?”(<장자> 12편 ‘천지’)

조선왕조 정체성의 원천인 공자를 능멸한 이 우화에서 유래한 ‘어우’(허망한 말)를 제 호로 삼은 이가 있다. 조선 중기 최고의 문장가 유몽인이다. 묵호자, 간재 등의 호도 있지만 그는 사실 ‘어우’로만 불리길 원했다. 이본이 30종이나 되는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던 그의 야담집 제목도 ‘어유야담’이었고, 자신의 문집 또한 ‘어우집’이라 이름했다.


그렇게 전복적인 그였으니 “누구에게도 머리 굽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나이 열다섯에 처고모부인 우계 성혼 밑에서 수학했지만, 채 1년도 있지 못했다. 그 이유를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전했다. “가르침을 잘 지키지 않고 행실이 경박해 (성혼은 유몽인을) 꾸짖고 끊어버렸다.” 성혼은 서인의 영수요 교조적 성리학의 대부였다. 그런 이들의 눈에 유몽인의 자유분방한 사유와 행동은 경박할 수밖에 없었다. 오세창 선생이 인정한 조선의 명필이었지만, 이 또한 최치원 등 이 땅의 토종 서체를 독학해 이룬 것이었다.


그는 1589년 31살에 증광문과 3장에서 모두 장원을 했다. 당시 최고의 문형(문장 평론가)이었던 노수신, 유성룡 등은 그의 시권(답안지)에 대해 “조선 100년 이래 한 번도 없었던 기이한 문장”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최립을 최고의 문장가로 쳤지만, 문신 권벽 같은 이는 “옛사람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흉중에서 나온 것이기에 최립의 문장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그 역시 이렇게 피력했다. “무릇 문장은 내 흉중에 쌓인 것을 스스로 노력해 구해야지, 구구하게 전작을 연습해 따르는 것은 중시할 가치가 없다.” 이런 자유정신에서 탄생한 것이 <어우야담>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은 과연 기상천외한 반전과 굴절로 당시의 세태를 풍자하고 세계관을 전복시켰다. 김침 이야기는 대표적이다. 김침은 당대의 한국판 카사노바였다. 장안 기생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장안의 한량들은 그 비결을 알아내려 성화였다. 그가 은밀히 전했다는 비결은 이렇다. “종처럼 굴라.”


관기라는 이유로 외면했던 논개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것도 그였고, 기생 황진이의 도발적 삶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와 가치를 흔들었다. 불가침의 규범이었던 삼년상도 중종 때 사림의 지도자 정광필의 말을 빌려 대놓고 비판했다. “우리 집안엔 효자가 필요 없다!” 양반가 최고의 명예였던 정려문의 컴컴한 이면에 대해서는 이런 일화를 남겼다. 한 양반댁 과부가 땡추와 놀아났다. 통정 중 땡추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집안에선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다. ‘며느리가 겁탈에 저항하다가 손가락이 잘리고 온몸에 자상을 입었다!’ 조정은 후일 그 집안에 정려문을 내렸다.


그가 급제한 해는 조선 500년 최대의 정치사건인 기축옥사가 발생한 해였다. 이후 조선은 임진, 정유 양대 왜란, 온갖 사화와 옥사 그리고 반정에 반정으로 혼란이 극심했다. 그 속에서 그는 당파를 떠나 시비 옥석을 가리는 데 목숨을 걸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 12월, 3년차 신참 관료(사헌부 지평)였던 그는 선조에게 이런 발칙한 상소를 올린다. “지금 왜적을 물리치는 것이 시급함에도 신하들을 접견하는 경우는 매우 적고 오히려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환관이나 궁첩들 따위랑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서야 쓰겠습니까.” 1602년 홍문관 교리 때는 민생을 외면하고 권력투쟁에 전념하는 동서 패당을 못 본 척하던 선조에게 이런 상소를 올렸다. “언로를 열고 … 사치를 억제하고 검약을 숭상하며, 탐욕스런 무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국왕이 언로를 닫고 사치를 일삼으며 간신배들과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는 파직됐다.


하지만 그는 검증된 행정가이자 외교관이었다. 선조는 1603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불러들였고, 동부승지, 대사성, 대사간을 거쳐 죽기 직전인 1608년 1월 도승지에 임명했다. 대통을 이은 광해군은 유몽인이 임진란 당시 호종했던 터여서 출세는 보장된 듯했다. 그러나 대쪽 같은 처신은 그로 하여금 더 큰 부침을 겪게 했다. 두 차례의 파직 끝에 1614년 한성부 좌윤으로 복귀, 1615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의 말마따나 “남의 숟가락이 조금만 커도 고변을 할” 정도로 권력자들의 정치공작이 극성했던 때였다. 그는 1618년 인목대비 폐모 문제를 놓고 대북과 정면으로 맞섰다. 나아가 저처럼 폐모론에 반대했다가 투옥됐거나, 조작 역모사건(해주옥사)에 걸려든 이들을 방면하려 했다.


1618년 4월 안처인 무고 사건이 발생했다. 남산에서 봄놀이를 하던 그는 이조참판이자 추국관으로서 국문장으로 호출됐다. “이처럼 좋은 시절에 어떤 도깨비 같은 자가 감히 익명으로 고변하여 이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게 만든단 말인가.” 이렇게 개탄하며 읊은 ‘백주지창’이 사달을 일으켰다.

추국 결과는 무고였다. 그는 광해군 앞에서 “어떤 자가 이런 재앙을 만들어내어 100명씩이나 연루되는 옥사를 빚었단 말입니까?”라고 푸념했다. 하지만 광해군과 권력집단은 ‘백주지창’을 빌미로 그를 쫓아냈다. 저희들을 ‘목 베어야 할 늙은 간신배’라고 무고했다는 것이었다.


선산이 있는 양주 서산(지금의 송추)에 머물던 1620년 광해군은 그를 예문관제학에 임용했지만 그는 출사하지 않았다. 1621년 월사 이정구가 그를 대제학에 추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월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늘날 조정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코 묻은 떡을 서로 먹겠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데, 날더러 코 묻은 떡을 함께 다투라는 것인가?” 1622년 그는 아예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거처를 철원 보개산 영은사로 옮겼을 때인 1623년 4월,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이 폐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지가 물었다. “새로운 임금이 나타나자 벼슬을 구하는 자가 시장에 몰려드는 것 같은데 왜 중로에서 배회하십니까.” 유몽인이 답했다. “산에서 내려온 것은 관직 때문이 아니라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외다.”

그곳에서 ‘상부탄’(청상과부의 탄식)을 남긴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키는구나/

사람마다 개가를 권하는데/

 …흰 머리를 젊은 얼굴로 단장한다면/

 어찌 연지분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 시로 말미암아 그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난다. 그가 역모와 무관하다는 사실은 반정 주역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처벌하지 않으면 반정에 따르지 않는 세론이 커질 것”(이귀)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를 처형했다.


170년이 지난 뒤 정조는 유몽인에게 씌워진 반역죄를 신원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혼조(昏朝, 광해군) 때는 바른 도리를 지켜 은거하였고, 반정한 후에도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정조는 ‘김시습을 설악산에 비기고 몽인을 금강산에 비기는’ 세론을 상기시키며 부연했다. “조용히 의리를 취한 정성은 털끝만치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니, 시습에게 베푼 것을 몽인에게 베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어우 유몽인 신원사실기’)


그의 문장은 권세가들에겐 추상 같았지만, 민중에게는 따듯했다.


“베 짜는 아낙네는 눈물만 뺨에 가득/

겨울 옷 애초에 낭군 입힐 작정이었지/

내일 아침 끊어서 관리에게 건네주면/

즉시 다른 관리가 찾아오리.”(‘양양 가는 길’ 전문)


용묘전설은 그런 그에 대한 민중의 헌사였다. 그는 죽어 부인의 묘(가평 하색리)에 합장됐다. 반정 세력은 그 터가 천하명당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묘를 파보니 과연 유몽인이 용이 되어 날아오르려 했다. 그들은 용을 능지처참했다. 그 후 유몽인의 묘는 용묘로, 그 지역은 능골이라 불렸다.


권력자들은 그를 집요하게 매장하려 했다. 기껏해야 재담꾼 정도로 기억하게 했다. 하지만 민중에게 그는 억압받는 이들을 구원하려다 실패한 용(메시아)이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