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이 피를 흘려 왕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참모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인물이 바로 하륜(1347~1416년)이다. 태조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하륜은 태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하고, 왕이 된 태종을 보필하면서 마지막까지 ‘태종의 남자’로 살아갔던 인물이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이 정평에서 졸하였다. 부음이 이르니, 왕이 심히 슬퍼해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철조(撤朝·나라에 변고가 생기거나 국상(國喪)을 당했을 때에 조회를 멈추던 일)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육류를 금함)했다. 쌀·콩 각각 50석과 종이 200권을 치부(致賻·임금이 특명으로 신하에게 부의를 내려 주던 일)하고 예조좌랑 정인지를 보내어 사제(賜祭·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 지내는 일)하게 했다.”
1416년(태종 16년) 11월 하륜이 사망했을 때의 기록이다. 하륜에 대한 태종의 신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륜의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본관은 진주다.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의 아들이다. 공민왕이 본격적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던 1360년(공민왕 9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고려시대 진사를 뽑는 시험), 1365년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이인복과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신흥사대부의 길을 걸었다. 1367년 신돈의 측근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기도 했지만 고려 말 공민왕, 우왕대에 주요 관직을 두루 지냈다.
하륜에게 정치적 위기가 온 것은 1388년 최영이 주도한 요동(遼東)정벌에 반대해 양주로 유배됐을 때다. 이후 복권돼 1391년(공양왕 3년)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됐다가 조선 건국 후에는 경기좌도 관찰출척사가 돼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조선 건국 후 하륜의 활약이 가장 돋보인 것은 새로운 도읍지 선정 과정에서였다. 처음 태조는 신도(新都)를 계룡산 일대로 정하고자 했으나, 하륜이 강력히 반대했다.
“태조가 계룡산에 도읍을 옮기고자 했는데, 감히 간하는 자가 없었다. 헌데 하륜이 힘써 청해 계룡산 도읍 이전이 무산됐다.”
하륜은 안산을 주산으로 해 현재 신촌 일대인 무악을 새 도읍지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태조는 결국 한양 천도를 주장한 정도전과 무학대사 등의 의견을 수용해 1394년 10월 북악을 주산으로 하는 한양으로 새 도읍지를 정했다. 1394년에는 명나라에 표전문을 보내는 문제로 정도전과 충돌하기도 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의 내용이 불손하다며 그 중심에 있던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이 이를 반대했지만 하륜은 외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누군가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정도전을 대신해 직접 명으로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태조의 신임을 받던 하륜이 본격적으로 태종의 남자가 된 과정에는 ‘관상’에 관한 일화가 있다. ‘태종실록’ 총서의 기록에는 하륜이 본래 관상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친구이자, 태종의 장인인 민제에게 “내가 관상을 많이 보지만 공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소.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민제의 주선으로 태종을 만난 하륜은 마음을 기울여 섬기게 됐다. 관상을 본 하륜이 이방원의 풍모를 보고 먼저 접근했다는 것은 킹메이커로서 하륜의 자질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정적 정도전의 존재가 두 사람을 확실히 결속시켰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왕자였던 이방원은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세자 방석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정도전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하륜 또한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갔던 만큼 정도전을 껄끄럽게 여겼다. 15세기 학자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는 하륜이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가면서 베푼 환송연에서 일부러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고 사과를 핑계로 이방원과 정도전 제거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 장면이 소개돼 있다.
특히 1398년 왕자의 난 때 하륜은 태종에게 정도전과 방석에 대한 선제공격을 제안함으로써 태종이 주도권을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왕자의 난이 성공한 후 태종은 거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질적인 맏형 방과(후의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하륜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고 정사공신(定社功臣) 일등에 오른다. 이어 1400년 11월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다시 좌명공신 일등에 봉해진다. 두 번 연속 일등공신이 되면서 하륜은 태종의 참모로서 그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1402년(태종 2년) 하륜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명나라를 방문해 태종의 지위를 확실히 인정받는 성과를 얻었다. 이듬해 4월 명나라 사신 고득 등과 함께 황제의 고명과 인장을 받들고 온 것이다. 태종은 하륜에게 특별히 토지와 노비를 하사해줬다.
태종의 남자로서 하륜이 보여준 대표적인 업적은 ‘연려실기술’에 기록돼 있다. 태종이 왕에 등극한 뒤,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번 사신을 보냈지만, 태조는 오히려 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바로 ‘함흥차사’다. 태조 주변 인물의 설득으로 태조는 마음을 바꿔 서울로 돌아오고 태종은 아버지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하륜은 태조의 분노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을 의식해 장막의 기둥을 크게 만들자고 제안했다. 놀랍게도 태조가 태종을 향해 쏜 화살은 하륜이 미리 대비한 나무 기둥에 박혔다. 그뿐 아니라 옥쇄를 전해줄 때도 태조는 쇠방망이를 소매 속에 숨겨뒀지만 하륜은 태종에게 “직접 받지 말고 내시를 시켜 받도록 하십시오”라고 조언함으로써 태종을 구했다. 이에 태조는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다”라며 태종을 인정했다. 하륜의 기지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신문고 설치와 저화 유통과 같은 주요 정책 결정에도 태종 곁에는 늘 하륜이 있었다. 1401년 태종은 백성들의 민원을 듣는 신문고 설치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조정 신료들 다수가 우려를 표방했으나, 하륜은 신문고의 적극적인 시행을 주장했다.
“신문고를 치는 법이 사실이면 들어주고, 허위면 죄를 주고, 월소(越訴·하급 관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직접 상급 관아에 소송을 내던 일)로 치는 자도 또한 이같이 하는 것입니다. (중략) 관리가 백성의 송사를 결단함에 있어 왕에게 아뢸까 두려워해 마음을 다해 세시하게 해서, 결국 백성이 그 복을 받으니, 실로 자손 만세 좋은 법입니다.”
비록 제대로 유통되진 못했지만 지폐인 저화(楮貨)의 유통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하륜이 추진한 정책 대부분은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그의 구상에는 왕권이 튼튼한 조선 만들기가 있었다. 하륜은 태종의 뜻을 받들어 ‘고려사’와 ‘동국사략’ 등의 역사 사서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며, 1408년에는 태조가 승하하자 ‘태조실록’ 편찬에 나서 5년 뒤 완성했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하륜은 1412년 8월에 다시 좌의정이 되고 1414년 4월에 영의정부사가 됐다. 이 무렵 하륜은 70세를 바라보는 원로대신이었는데 70세가 되던 1416년 선왕의 능침을 순시하러 함길도에 들렀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태종의 참모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실록의 졸기에는 하륜에 대해 ‘책략가면서 언행은 신중했던 인물’로 묘사한다. 성리학 이외 다양한 학문에도 정통했으며 음양, 풍수지리에도 해박했다.
참모로서 하륜은 특히 외교 부문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명나라와 외교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점에 외교 문서 작성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직접 명나라에 들어가 외교 현안을 여러 차례 해결했다.
하륜은 고려 말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조선 건국 후 태조와 태종의 연이은 신임을 받아 조선 건국 주역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정몽주, 정도전, 최영, 이성계, 이방원 등 여말선초를 이끌어간 쟁쟁한 인물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참모로서의 위상은 결코 낮지 않았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93호·설합번호 (2017.01.25~02.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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