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동아일보 2002-04-18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청풍계(淸風溪)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종로구 청운동(靑雲洞) 54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楓溪)라 불렀는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이
별장으로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 부는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한다.
선원이 이 곳을 별장으로 꾸민 것은 선조 36년(1608).
이 해 2월에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8월 선원이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현재 서울시 제2부시장 격)이 되니
아마 이때쯤에 이뤄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곳은 원래 선원의
고조부인 사헌부 장령 김영수(金永銖·1446∼1502)가 살던 집터였다.
그의 맏형인 학조(學祖)대사가 잡아준 명당터라는 것이다.
학조대사는 세조 때부터 중종 때까지 왕실의 귀의를 한몸에 받았던
불교계의 대표였다. 당연히 풍수지리에 정통했던 그가 자신을 극진하게
공경하는 막내 제수 강릉 김씨를 위해 잡아준 집터라 하니 한양 도성 안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터였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사실 이 곳은 훗날 안동 김씨 200년 집권, 60년 세도의 산실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이 터는 청운초등학교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댁 등
몇몇 부호들의 사가로 나누어져 있다.
선원과 그 아우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 형제가 율곡 학통을
이어 이 곳 인왕산과 북악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결과 그들의 증손자 세대에
이르러서는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 등 진경문화의
선두주자들을 배출하게 되고 그들의 문하에서 진경문화의 주역인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쏏川 李秉淵·1671∼1751) 등이 출현하여
진경문화를 절정으로 이끌어간다.
따라서 겸재가 진경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이 청풍계를 많이
그렸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현재 세상에 알려진 것만도 여러 폭인데
그 중에 이 청풍계가 대표작이다.
‘기미년 봄에 그렸다’는 겸재 자필의 글씨가 있어서 겸재가 64세 나던 해인 영조 15년(1739)에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을 끄는 바위절벽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모습대로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사가의 뜰 안으로 숨었는지
아니면 파괴되어 사라졌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흔적조차 가늠할 길 없다.
키 높은 전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훤칠하게 자라난 아름드리 노송의 표현에서 300년 묵은 고가의 전통을 실감할 수 있다.
청운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청풍계와 백운동(白雲洞)을 합쳐 지은 것이다.
(참고- 이본 비교 간송미술관소장품-고려대학교박물관소장품)
정선-장동8경첩-청풍계, 간송미술관소장
정선-청풍계지각(淸風溪池閣) 동아대학교박물관
정선-장동팔경첩-청풍계(淸風溪)-국립중앙박물관
정선-청풍계-호암미술관소장
청풍계 속의 연못 건물등의 이름 표기
구룡초부님의 불로그에서 http://blog.daum.net/robustus/11518530
청풍계의 위치(구글지도)
구룡초부님의 불로그에서 http://blog.daum.net/robustus/11518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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