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정경원의 디자인 노트] [115] '아트북'처럼 예쁜 스위스 여권

바람아님 2017. 2. 18. 23:42
조선일보 2017.02.18 03:13

해외여행의 필수품인 여권은 '조용한 외교관'이다. 여권만 보아도 소지한 사람이 속한 나라의 품격을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가 브랜드 정체성 향상을 위해 여권을 독창적으로 디자인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네덜란드 여권은 페이지마다 위대한 선조들의 초상과 주요 업적을 담은 작은 그림 역사책이다. 핀란드 여권은 페이지를 빨리 넘기면 오른쪽 모서리에 달리는 순록이 나타나는 플립북 스타일이다. 캐나다 여권은 단색조로 인쇄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자외선 불빛을 비추면 현란한 색채가 나타나 위조가 어렵다.


전 세계 여권 220여종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2003년 발급된 스위스 여권이다. 스위스 연방정부의 새 여권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은 지폐 디자인 전문가 로저 푼드는 단조롭고 칙칙하던 여권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경쾌하고 세련된 '스위스다움'을 표현했다. 스위스 특유의 선명한 빨간색 표지에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 네 가지 공식 언어와 영어로 '스위스 여권'이라는 글자와 국기를 흰색으로 나타냈으며, 2010년부터 전자여권 로고를 추가했다. 글자체는 섬세하고 가독성이 높은 프루티거 서체(Frutiger Font)를 활용하여 읽기 쉽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 바탕에는 작은 십자 문양들을 방사형으로 엠보싱(돋을무늬기법)하여 요철(凹凸) 효과가 은은하게 나타난다. 40쪽 내지에는 페이지마다 십자 문양을 중심에 두고 26개 자치주의 문장과 건축물 등을 다채로운 색상으로 표시했다.


작은 아트북처럼 예쁜 여권이 등장하자 사용하던 여권의 유효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새 여권을 받으려고 길게 줄 설 만큼 국민의 호응이 대단히 높다. 여권을 친화적으로 디자인하려는 국가들이 스위스 여권을 벤치마커로 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경원 세종대 석좌교수·산업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