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중한 신하 선발 안목 지녔지만 속으론 재능 시기했던 선조
생전의 이순신에겐 파격 포상하고 절차 뛰어넘는 벼슬 내렸지만
충무공 노량해전서 전사하자 "大捷은 빈말 아니냐" 의심해
담대함이 무장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면 이순신은 누구보다 그 점에서 뛰어났다. 그가 여진족 반란군의 제2인자 우을기내를 유인해서 체포한 현장이 건원보(지금의 함경북도 경원) 앞이었는데, 하필 그 건원보 권관(종9품 수장)으로 좌천되고도 태연하게 부임했다. 여진족은 본래 복수심이 매우 강한 종족으로 유명했다. 우을기내 생포 작전의 지휘자였던 것이 알려지면 가열찬 복수전의 과녁이 될 게 뻔한데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그는 대담했다.
그해(선조 16년·1583년) 11월 15일 충청도 아산 본가에서 이순신의 부친이 별세했다. 도중에 차질이 있어서 부음은 이듬해 1월에야 건원보에 도착했다. 친상을 당한 모든 벼슬아치 관례대로 그는 즉시 벼슬을 내놓고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본가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그의 건원보 권관 시절은 석 달 남짓으로 끝났다.
'이순신 행록'에 따르면 그가 고향 집에서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조정에서 그에게 벼슬을 내리기 위해서 두세 번이나 "언제 상복을 벗느냐?"고 문의했다. 이순신이 탈상(脫喪)한 직후부터 선조의 특혜가 시작되었다. 첫 특혜는 이순신에게 무려 10단계가 넘는 초수(超授·정상적인 절차와 단계를 크게 뛰어넘는 벼슬 임명)를 시행하여 종4품 조산보(함경북도 선봉) 만호로 임명한 것이다.
그 인사 조치는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건원보 권관에서 물러난 뒤 이순신이 한 일이라고는 집에서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탈상 직후 그처럼 매우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은 그 조치의 배경을 명백하게 알려준다. 바로 우을기내 생포 작전 성공에 대한 뒤늦은 포상이었다. 이유는 조정에서 벼슬을 주려고 상제(喪制)인 이순신에게 두세 번이나 탈상 시기를 물었고, 또 탈상하자마자 주어진 벼슬이 10단계나 뛰어넘는 초수였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이순신 조산보 만호 추천설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상제를 극도로 중시하던 그 시대에 친구에게 부친상의 탈상 시기를 여러 번 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당시 관행상 신하는 임금에게 무려 10단계 초수를 해야 하는 벼슬자리를 감히 추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선조가 먼저 뒤늦은 포상으로 이순신을 만호로 올려주면서 육진(六鎭)의 국경을 지키게 하려고 기획했고, 그 뜻을 받들어 류성룡이 조산보 만호 자리를 추천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19년(1586년) 초 이번에도 이순신은 사양하지 않고 육진으로 가서 조산보 만호로 부임했다. 이때 그는 우을기내 생포 작전 관련 정보가 이미 여진족에게 알려졌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는 부임 뒤에 조산보 성을 새로 쌓았다.(이일, '제승방략') 여진족이 우을기내를 위한 복수전을 벌이려고 쳐들어올 것에 대비한 새로운 축성으로 보인다. 성의 신축은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이때는 니탕개의 난이 확실하게 종식됐다고 인정된 시기였다.
그래서 대전란을 치르면서 몹시 피폐해진 육진의 제반 사정상 평화 시에 새로 성을 쌓는 큰 역사를 허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선조는 이순신의 조산보 성 신축 요청을 파격적으로 허락했다. 이후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특혜는 줄기차게 계속되어 그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임금으로서 선조의 정체성을 생각해본다. 선조를 암군(暗君·아둔한 임금)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다른 무엇보다 율곡 이이와 이순신 같은 현능한 신하를 발탁하고 다른 신하들의 반대를 억누르면서까지 일을 맡겨 국가 보위에 성공한 예리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를 현군(賢君)이라고 하는 것도 맞지 않는다. 그처럼 훌륭한 신하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고맙게 여기기보다 자신을 능가하는 그들의 유능함과 뛰어남을 마음속으로 미워하면서 살아 있을 때만 이용하는 단순 소모품 취급했기 때문이다.
선조가 이율곡과 이순신을 대했던 자세의 종결판은 그들이 죽은 뒤에 드러났다. 선조는 죽은 그들을 매우 야박하고 야멸치게 대하는 것으로써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 기에 눌리면서 쌓였던 숨은 원한을 풀었다. 그래서 신하에게서 "상(上)께서 생전의 이이를 대한 것과 죽은 뒤에 이이를 대하는 것이 다릅니다"라는 지적까지 받았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뒤 명나라 장수들은 서둘러 전투지에 사람을 보내 이순신을 위해 제사를 지냈건만, 선조는 명나라 장수들이 독촉하는데도 버텼고, "노량에서 대첩을 거뒀다는 게 빈말 아니냐?"고 크게 의심했다. '죽은 이순신'을 마냥 무시하고 깎아내리고 싶은 비뚤어진 마음이 시킨 소행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전사할 때까지 그런 신경병적 자세와 마음과 영혼을 지닌 선조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길항 관계의 긴장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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