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주변 인물을 더욱 빛나게 했다는 점이다. 과학자 장영실, 음악가 박연, 국방 개척 김종서와 최윤덕, 명재상 황희, 허조, 맹사성, 집현전 학자인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 수많은 인물이 세종과 함께했다. 세종은 개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주변 인물 능력을 한껏 끌어올린 왕이라는 점에서도 존경받는다.
세종과 함께했던 참모 중 과학 분야를 대표했던 인물이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이다. 장영실은 2015년 모 방송사의 대하사극 주인공으로 등장해 대중에 더욱 친근해졌다. 특히 장영실의 아버지가 중국의 쑤저우나 항저우 사람, 어머니가 신분이 천한 동래현의 관기(官妓)였다는 점에서 장영실의 성공담은 더욱 감동적이다.
▶태종에 의해 발탁된 장영실
▷세종의 신임 바탕으로 승승장구
사실 장영실은 세종에 앞서 태종이 처음 발탁한 인물이다. 당시 장영실의 신분이 미천해 관직 제수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세종은 장영실의 능력을 높이 사서 상의원 별좌에 임명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똑똑하기가 보통이 넘으니, 나의 곁에 가까이서 내시(內侍)를 대신해 명령을 전했다.” (세종실록)
이 기록을 통해 장영실은 실질적으로 세종의 참모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처음 장영실을 옷 만드는 관청인 상의원에 배치한 것은 그의 정교한 기술과 솜씨를 파악하고, 일단 이곳이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장영실의 과학적 재능을 알아본 세종은 그를 가까이 두면서 과학에 필요한 역량을 키웠다. 1425년 4월 18일에는 평안도 감사에게 장영실이 말하는 대로 대, 중, 소의 석등잔 30개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 석등잔은 국경 지역인 평안도에서 군사용으로 활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1432년 1월에는 “벽동군(碧潼郡) 사람 강경순이 푸른 옥을 진상하자, 장영실을 보내어 이를 채굴하고, 사람들이 채취하는 것을 금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영실이 광물 채취와 제련 기술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434년에는 세종 시대에 주조된 활자인 갑인자(甲寅字) 제작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장영실은 세종 시대 과학과 국방 분야에서 착실한 참모 역할을 했고, 세종 또한 장영실의 관직을 올려주며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1433년에는 정4품 호군(護軍)이 됐고, 1437년에는 종3품인 대호군(大護軍)에 올랐다. 천민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한계 속에서 장영실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종3품 직위에 올랐다. 그의 파격적인 승진에는 절대적인 후원자 세종이 있었다.
자신을 배려한 세종에게 장영실이 보답한 성과물이 바로 자격루(自擊漏)다. 세종은 어떤 왕보다도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시계 제작에 총력을 기울였다. 앙부일구(仰釜日晷)라고 불리는 해시계에서 일단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해시계는 해가 없는 밤이나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세종과 장영실은 힘을 합쳤고, 마침내 자격루를 발명할 수 있었다. 자격루는 물을 넣은 항아리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흘러나오게 만든 기계였다. 물을 보내는 그릇 넷과 물받이 두 개로 구성돼 있는데, 떨어지는 물방울의 양을 이용해 시각에 따라 저절로 종이나 북, 징을 울리게 한 것으로, 일종의 자동 시간 알림 장치였다.
이름을 ‘자격루’라 한 것도 ‘스스로 쳐서 울리는 시계’라는 뜻이다. 자격루는 2시간마다 한 번씩, 하루에 12번씩 종을 쳐서 시각을 알렸는데, 2시간마다 12지(支)의 동물 모양이 나왔다. 1434년(세종 16년) 7월 완성된 자격루에 대해서는 핵심 내용이 실록의 기록에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다.
“호군 장영실에게 명하여 사신(司辰·간지를 맡음) 목인(木人)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도록 하였으니, 그 제도는 아래와 같다. 먼저 각(閣) 3칸을 세우고, 동쪽 간 자리를 두 층으로 마련하여, 위층에는 세 신(神)을 세우되, 하나는 시를 맡아 종을 울리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울리며, 하나는 점(點)을 맡아 징을 울린다. 중간층의 밑에는 평륜(平輪·평평한 바퀴)과 순륜(循輪·돌아가는 바퀴)을 설치하고 12신을 벌여 세워서, 각각 굵은 철사로서 줄기를 만들어 능히 오르내리게 하며, 각각 시패(時牌)를 들고서 번갈아 시간을 알린다.”
자격루가 완성되자 세종은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있는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했다. 그해 7월 초하루부터는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시계로 삼았다.
▶기록에서 사라진 장영실
▷그를 둘러싼 갖가지 의문
장영실은 자격루에 만족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 제작에 착수했다.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를 결합한 천문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자격루와 혼천의,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절기에 따른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해당 절기에 농촌에서 해야 할 일을 백성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독자적인 문화(자주), 모든 것은 백성을 위한다는 민본, 생활에 편리하도록 해야 한다는 실용 등. 세종은 자신이 표방한 시대정신인 자주, 민본, 실용을 모든 분야에 적용했다. 혼천의나 자격루 또한 이런한 시대정신에서 비롯됐다.
자격루가 완성된 지 4년 후, 1438년(세종 20년)에 장영실은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제작했다. 이어 세종의 명령을 받은 장영실은 옥루를 비롯한 주요 과학 기구들을 설치한 흠경각(欽敬閣)을 만들었다. 흠경각은 경복궁의 침전 서쪽에 설치한 건물. 흠경각이라는 이름은 ‘서경’의 요전(堯典)에 나오는 전설에서 요임금이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해 “하늘을 공경해 백성에게 때를 일러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문구에서 유래했다. 흠경각에는 간의, 혼의, 혼상, 앙부일구, 일성정시, 규표, 금루 같은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과학 기구가 보관됐다.
세종의 총애 속에 승승장구하던 장영실이 실록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은 세종의 수레에 문제가 생겨서 처벌을 받은 것이다. 1442년(세종 24년) 4월 27일 의금부는 장영실이 왕의 마마를 제대로 제작하지 못한 죄를 아뢰었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왕이 타는 수레)를 감독해 제조함에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해 부러지고 부서지게 했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일백 대를 쳐야 될 것입니다.”
장영실의 당시 임무는 가마의 제작 감독이었다.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졌는데,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지만 왕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을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하라 압력을 넣었고, 이로 인해 장영실은 곤장까지 맞아야 했다. 세종은 감형(減刑)해 처벌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1442년 대호군 직책에서 파면된 이후 그의 만년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한때 세종에게 그토록 총애를 받았던 장영실의 갑작스러운 해임과 처벌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일설에는 장영실의 과학적 재능을 견제한 명나라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기 위한 세종의 배려라는 해석도 나오지만 구체적인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천문 과학 기구 프로젝트가 끝난 후 세종이 다른 사업에 역점을 두게 되며 장영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돼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역시 정확한 근거는 없다.
천민 신분에서 태종에게 발탁되고 세종의 신임을 얻어 조선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장영실. 신분보다는 그 사람의 능력만을 보고, 확실히 지원한 세종을 만났기에 그 능력을 더욱 꽃피울 수 있었다.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은 능력 있는 참모의 발탁과 그 재능의 활용이야말로 리더의 주요한 덕목임을 다시금 환기시켜준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97호 (2017.03.01~03.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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