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맡던 국경 녹둔도에 여진족 침입해 조선인들 잡아가
"패전한 군사 책임자는 참형" 방침 고수하던 선조는 말 바꿔
'백의종군' 처분하고 살려둬.. 바로 5년 뒤에 임진왜란 발발
선조 20년(1587년)은 액운의 해였다. 조선의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전란이 일어났다. 먼저 그해 2월에 대규모 왜적이 전라도 해안 일대에 쳐들어와 막심한 피해를 안겼다.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 이후 잠잠했던 왜적이 32년 만에 다시 쳐들어온 것이다. 전란 처리는 니탕개의 난 때와 똑같았다. 평소 "초나라가 강국이 된 건 패전한 장수를 반드시 죽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선조는 피해 지역 최고사령관인 전라좌수사 심암을 참(斬)했다. 심암은 끝까지 자신에게 과해진 처벌에 승복하지 않고 죽었다(선조실록, 선조 20년 4월 1일). 어쨌든 그것으로 선조가 전란 때마다 단호하게 시행하는 '패전한 군사 책임자는 반드시 참형에 처한다'는 전란 대처 방침이 조선인들 모두에게 더욱 명확하게 각인됐다.
그해 9월에는 북쪽 국경인 육진에서 니탕개의 난 이후 4년 만에 다시 여진족이 침입했다.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이순신이 관리하는 녹둔도에 여진족 대군이 쳐들어온 것이다. 둔전 개간 이래 처음으로 풍년이 든 녹둔도 곡식을 추수하기로 정해진 날은 9월 24일. 이순신은 직속 상관인 경흥 부사 이경록과 녹둔도로 갔다. 그간 둔전에 투입해 농사를 지어온 농군들 외에 수확을 위해 추가로 뽑은 추수꾼들을 많이 거느렸다. 곡식 수확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돌연 여진족 대군이 나타났다. 추수 날을 공격일로 잡은 것이다. 그간 이순신이 크게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순신의 상관인 북병사 이일은 필시 대규모였을 적군의 수효를 일절 기재하지 않았다. 그가 이순신에 대해 심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기에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보인다. 하지만 그가 편찬한 '제승방략'에 기록된 당시 전투 상보만 봐도 두만강 유역의 여러 지역 추장들의 이름과 내륙에 있는 사나운 여진족 세력 등이 모두 망라돼 있어 적의 수효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적군은 두 갈래로 갈라져 행동했다. 한쪽은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군을 공격하고 다른 쪽은 추수꾼들을 납치했다. 추수꾼 대부분은 들판 끝으로 달아나고 이순신과 이경록을 비롯한 극소수 군사만 급히 목책에 들어가 필사적으로 적군과 싸웠다. 방어 구조라고는 광활한 들판 가운데에 있는 작은 목책뿐이었기에, 전투는 조선군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공격을 주도하던 추장 마니응개를 비롯한 여진족 전사 여럿이 전사하자 적군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적군은 포로 210여 명을 끌고 갔다. 이순신은 그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이경록과 함께 목책에 있던 극소수 군사를 이끌고 적군의 뒤를 추격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강고한 의지와 실력이 없으면 감행하기 힘든 추격전이었다. 이순신은 포로 50여 명을 되찾고 여진족 머리 3급을 베고 말 한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래도 16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아군 전사자는 11명이었다.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과 이경록을 가두고 패군(敗軍·전투에서 패배함)한 죄를 승복받으려고 했다. 녹둔도 방어 병사를 증원해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한 것 때문에 자신도 연루돼 처벌될까 봐 더 사납게 굴었다. 사람들은 경원 부사 김수와 전라좌수사 심암의 전례로 보아, 이순신도 죽은 목숨으로 생각했다.
북병사의 장계로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자 모두 놀랐다. 당시 병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정언신은 즉각 자신을 처벌해주기를 자청했다. "녹둔도 둔전은 신(臣)의 발의로 시작되었는데, 이런 전란이 발생했으니 먼저 신을 다스려서 조야(朝野)에 사과하소서!"(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4일) 그것은 필시 참형에 처해질 것으로 생각되는 이순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절박한 요청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그런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긴 나머지 뒷날 위험을 무릅쓰고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된 정언신을 옥중으로 찾아가서 문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선조의 입에서 듣는 이 모두가 귀를 의심할 명령이 떨어졌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북병사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죄를 진 무장에게 과하는 형벌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이 '백의종군'으로서 단순한 보직 해임 조치다. 게다가 선조는 녹둔도 전투를 일으켜서 이순신을 공격한 여진족을 응징하라고 지시했다. 석 달여 뒤인 선조 21년 1월 15일 조선군 2700여 명이 두만강 건너 여진족 주요 근거지를 공격해 몰살한 '시전부락 전투'가 일어났다. 녹둔도 패전에 관한 너무도 파격적으로 관대한 처리와 '시전부락 전투'는 그때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 갖고 있던 강력한 신임과 특혜의 극대치를 드러낸다.
선조가 전례대로 녹둔도 전투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참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녹둔도 전투로부터 불과 5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그때 이순신을 살려줌으로써 이미 나라를 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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