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상 치르고 돌아온 이순신, 軍事와 農政에 모두 능력 발휘
여진족 침략 대비해 성 쌓고 六鎭 주둔군 군량 확보 위해 녹둔도 屯田 관리까지 맡아
흉년 거듭하던 땅에 풍년 들어
함경북도 육진에 여진족이 대거 침공한 니탕개의 난이 일어난 선조 16년(1583년) 말, 조선의 새로운 국경정책이 결정됐다. 도순찰사 정언신이 선조에게 비어 있는 땅 녹둔도에 둔전 개간을 허락해주기를 요청해 윤허를 받았다. 두만강 하구 섬 녹둔도의 당시 넓이는 100여리(김성일, '북정일록'). 광활하고 비옥한 땅이었다. 둔전 개간은 피폐한 국력 때문에 육진에 군량 대기가 너무도 힘든 난관을 타개하려는 비상조치였다. 그런데 바로 이 녹둔도 둔전 문제가 당대에 유명했던 '녹둔도 전투'와 '시전부락 전투'로 이어지면서 북쪽 변경에 새로운 전쟁 상태를 만들었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생애 최초의 백의종군을 하게 만들었다.
선조 17년 봄, 경흥부사 원호의 주관으로 녹둔도 개간이 시작됐다. 애써 일년 농사를 마쳤으나 소출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 이듬해도 마찬가지였다. 선조는 녹둔도 둔전에 기대가 매우 컸다. 선조 19년 초, 왕은 봄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녹둔도 둔전관'이란 직책을 신설하고 특별히 대궐의 선전관 김경눌을 현지에 보내 둔전 관리를 전담하게 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김경눌은 체격 좋고 얼굴도 훤해 용모가 뛰어난 무장이었다. 선조는 그를 녹둔도에 보내면서 지원도 크게 했다. 남쪽 지방 장정을 다수 뽑아 농군으로 삼고 소와 농기구도 대거 투입하도록 조치했다. 그처럼 공을 들였는데도 그해 수확 역시 좋지 않았다.
그해 초 이순신도 조산보 수령으로 부임했다. 종9품 건원보 권관으로 근무하다가 부친상으로 귀향해 삼년상을 치른 이순신이 종4품 조산보 만호로 파격적인 승진 임명을 받아 육진으로 돌아온 것이다. 녹둔도와 조산보는 같은 경흥진 소속인 데다 불과 5리 거리여서, 같은 시기에 부임한 두 지역 수장(首將)은 서로 잘 알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보기에 녹둔도 둔전관 김경눌은 문제가 많았다. 수확이 시원치 않았던 것은 그의 둔전 관리 능력이 미흡해서였다. 게다가 김경눌은 겁이 너무 많았다. 우을기내 생포 작전을 주도한 이순신은 복수심 강한 여진족이 언젠가 반드시 감행할 복수전을 맞받아 치를 각오를 하고 육진에 부임한 상태였다. 부임 즉시 조산보 성을 새로 쌓고 유비무환의 각오로 담대하게 국경을 지키고 있는데, 바로 이웃에 있는 녹둔도 둔전관이 여진족에 대한 심한 두려움으로 늘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곤란했다.
이순신은 김경눌이 두려움을 떨치도록 할 기발한 사건을 준비했다. 밤에 호인(胡人) 한 사람을 김경눌의 숙소로 보내 여진족이 쳐들어온 것처럼 꾸몄더니 김경눌은 너무도 경악하며 바지만 겨우 걸친 몸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그런데 그런 장난 같은 일을 벌일 당시 이순신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정보망을 통해 국경지대 수령들의 움직임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보고받고 있던 선조에게 이 사건이 보고됐다. 선조는 격분해 김경눌을 파면하고 이순신이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도록 발령했다. 그것은 이순신의 권력과 권한을 두 배로 키워준 것으로, 본질로 보자면 특혜성 임명이었다.
이 일화에는 기막힌 후일담이 있다. 사건 당시 선조는 김경눌은 아주 하찮은 무장이고 이순신은 여러모로 매우 뛰어난 무장이라고 판단해 그런 발령을 했다. 그러나 정유재란 직후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선조는 표변했다. 같은 김경눌 희롱사건을 이번에는 이순신의 나쁜 점을 잘 드러낸 중요 사건으로 포장해 어전회의 석상에서 신하들에게 이야기하고 크게 비난함으로써 그 일화가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
아무튼 이순신은 능력자였다. 그가 녹둔도 둔전을 담당한 선조 20년(1587년) 처음으로 녹둔도에 풍년이 들었다. 세심하게 둔전을 관리하면서도 그는 여진족이 자신을 상대로 벌일 복수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둔전관 겸임 전의 그는 조산보에 새로 굳게 쌓은 성만 잘 지키면 됐다. 그러나 녹둔도는 너른 농토 중심부에 세워놓은 작은 목책이 방어 구조의 전부였다. 적들이 대군을 동원해 인해전술로 휩쓸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여진족도 그런 전투를 선택할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순신이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게 된 것은 호랑이 꼬리를 밟은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제 호랑이가 돌아서서 달려들 일만 남았다. 그래도 이순신의 기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미리 챙겼다. 그는 새 북병사 이일에게 녹둔도를 지킬 병사를 증원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이일은 불응했다. 대규모 여진족이 농토뿐인 녹둔도를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판단은 정확하고 예리했다. 그의 우려는 이내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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