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확정되면서 조선시대 왕을 탄핵했던 사례에 관심이 쏠린다. 가장 유사한 정치적 사건을 꼽는다면 바로 두 차례 반정일 것이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축출되고,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역사 속으로 들어가본다. 놀라운 것은 연산군과 광해군 최후에는 장녹수(張綠水, ?~1506년)나 김개시(金介屎)와 같은 국정을 농단한 여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반정의 역사에는 오늘의 정국과 겹치는 장면이 너무나 많다.
▶연산군의 공포정치
▷장녹수만 끝까지 옆에 남아
1506년 9월 당시 100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반정이 일어났다. 연산군의 서슬 퍼런 독재에 저항하는 신하들이 조직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으로 대표되는 반정군은 군사를 앞세워 연산군 거처인 창덕궁으로 몰려들었다. 궁궐을 지키던 군사들은 모두 담을 넘어 도망을 가고 궁궐 안은 텅 비었다. 반정군에 의해 체포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를 갔다가 두 달 후 쓸쓸히 최후를 맞이했다.
연산군은 1498년의 무오사화에 이어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비판 세력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그야말로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한 해 세금도 버거워하던 백성들에게 2, 3년치 세금을 미리 거둬들이는가 하면 노비와 전답에도 각종 명목을 붙여 세금을 부과해 백성 부담을 크게 했다. 또한 1504년 8월, 연산군은 금표(禁標)를 확대해 경기도 일원의 민가를 철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금표는 본래 군사 훈련이나 왕의 사냥을 위해 일시적으로 백성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지역을 말한다. 연산군은 민가를 허물고 입구마다 금표비(禁標碑)를 세워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자신만의 향락의 무대가 되는 사냥터를 넓혀갔다. 관리들에게는 ‘입은 화(禍)의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라는 섬뜩한 글귀를 새긴 ‘신언패(愼言牌)’를 차고 다니게 했으며,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이 한글로 쓰였다고 해서 한글 학습을 탄압하고 한글 간행 서적을 불사르기도 했다. 자신의 패악한 행위가 공개되는 것은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연산군은 궁궐에서 자주 잔치를 베풀며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왕이기도 했다. 자태가 고운 여자들을 전국 팔도에서 찾아내어 이들을 궁궐의 기녀로 차출했는데, 이때 뽑힌 기녀들은 운평·가흥청·흥청 등으로 불렸다. 연산군이 흥청과 같은 기생을 끼고 노는 것을 한탄한 백성들은 이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의미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을 민간에 유행시켰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대부분 신하와 군대도 돌아섰지만 연산군을 끝까지 지킨 인물은 놀랍게도 흥청 출신의 후궁 장녹수였다.
“성품이 영리해 사람의 뜻을 잘 맞췄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해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다. 그러다가 대군(大君) 가노(家奴)의 아내가 돼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됐다.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했으며, 나이는 30여세였는데 얼굴은 16세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해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해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연산군일기의 내용이다. 기록에서 보이듯 용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지만,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해 상으로 주는 돈이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냈고, 금은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전답·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해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장녹수 위세를 믿고 그 하인들마저 행패를 부렸으며, 모두가 출세하기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10일 전인 1506년 8월 23일. 연산군은 후원에서 궁녀들과 잔치를 하다 시 한 수를 읊다가 갑자기 눈물을 두어 줄 흘렸다고 한다. 다른 여인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으나, 장녹수는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의 등을 어루만지며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는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했다고 한다. 어느 순간 연산군과 장녹수는 운명공동체가 돼 있었던 것이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발생했고 장녹수는 반정군에게 붙잡혀 앞에서 참형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며 “나라의 고혈이 여기서 탕진됐다”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마지막에 광해군 등에 칼 꽂아
1623년 3월 창덕궁로 몰려간 반정군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반정에 함께 참여한 능양군을 왕으로 세웠다. 조선 역사상 두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이다. 독재군주의 전형을 보여준 연산군 폐출과 달리 인조반정은 당쟁의 결과라는 관점도 있다. 광해군 초반에 시행한 대동법 등의 개혁 정책과 실리 외교라는 노선에 대해선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북인 중에서도 자신과 코드가 맞는 대북(大北) 세력 중심으로 공안정국을 운영한 ‘그림자’에서 완전 벗어나지는 못한다.
광해군이 후반 비판 세력 목소리를 거의 수용하지 않고 정치적 독재를 할 무렵 그에게도 판단을 흐리게 하는 여인이 있었다. 주인공은 상궁 김개시. ‘시(屎)’ 자의 순우리말인 ‘똥’으로 불러 김개똥으로 불리기도 했다. ‘계축일기’에는 ‘가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장녹수나 장희빈처럼 후궁 지위로 왕의 판단을 흐리게 한 여인들과 달리, 김개시는 상궁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었다. 광해군과 김개시의 인연은 광해군의 세자 시절인 선조 때부터 시작된다. 김개시는 용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비밀스러운 방책으로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광해군의 최고 심복 이이첨과 교분을 맺게 됐고 권세가와 자유롭게 접촉했다. 김개시는 이이첨이 영창대군을 역모 혐의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이에 적극 가세하면서 광해군을 정치적으로 도왔다.
광해군의 후원 속에 김개시는 관리들의 인사에도 나섰다. 위로 감사·병사(兵使)·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권관(權管)·찰방에 이르기까지 천 냥, 백 냥 하는 식으로 관리를 낙점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김상궁은 선조 때의 궁인으로 광해군이 총애해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줌으로써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는 ‘광해군일기’ 기록에는 광해군 후반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김개시의 모습이 나타난다. “김상궁의 조카사위인 정몽필은 바로 아전의 자식이었는데 권력을 믿고 기세를 부려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는 기록에서는 국정을 농단하는 인물 주변에 부패한 친인척이 들끓는 상황을 보여준다.
광해군 정권 내내 국정을 농단한 그녀였으나, 정작 마지막에는 광해군 편이 되지 못했다. 반정군 쪽에 포섭돼 김자점 등에게서 뇌물을 받은 김개시는 여러 차례 반정을 알리는 상소를 받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이귀와 김자점 등의 반역 모의를 알리는 전언에 대해 김개시는 광해의 손을 잡고 크게 웃으며, 광해군에게 반정의 징표를 묵살하도록 했다. 반정의 기미를 알리지 않고 광해군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김개시는 반정 공신이었지만, 반정 세력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직후 김개시는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처형됐다. 반정으로 축출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시대 내내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들의 이름에는 왕자 시절의 호칭인 ‘군(君)’만이 남아 있다.
조선판 탄핵이라 할 수 있는 반정으로 폐출된 연산군과 광해군. 그 폐출 과정과 더불어 그들과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지금도 비슷한 정치적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더욱 와 닿는 시점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99호 (2017.03.15~03.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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