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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분노는 '트풍' 보다 힘이 세다

바람아님 2017. 5. 2. 08:12
중앙일보 2017.05.02. 02:17

이번 대선의 뇌관은 안보보다는 화난 국민, 즉 '분노한 민심'이다
'촛불의 분노'와 '태극기의 분노' 누가 잘 대변할지가 최대 화두
유권자는 투표소에 줄 서겠지만 누가 되든 책임정부와 거리 멀어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역시 트럼프였다. “사드 비용 10억 달러 내라!” 지난 주말 날아든 비용청구서에 민심이 뒤집혔다. ‘이제까지 본 것 중 신기에 가까운 굉장한 장비’이니 공짜로는 안 되겠다는 트럼프의 장바닥 셈법에 친미 성향의 표심이 흔들렸다. 강매자 트럼프가 배수진까지 쳤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끔찍한 협상이다. 고로 재협상 아니면 종료한다”고. 논리고 윤리고 들이댈 게 없다. 우리가 사드 달라고 통사정한 것도 아닌데 값을 치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소인왕국의 토끼 같은 대선후보들이 저 거칠기 짝이 없는 강대국 맹수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세계 정치를 장사꾼 논법으로 확 바꾼 트럼프, 의뭉스럽지만 뒤끝 작렬하는 시진핑, 전리품 챙기는 데에 이골이 난 아베, 그리고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푸틴. 국제정치에 작동하던 우호적 이성을 다 팽개친 강대국 맹수들 사이에 대선후보 중 누구를 갖다 놔도 그림은 초라하다.


트럼프의 돌발 수(手)에 대한 대선후보들의 반응이 쪼잔해서 더욱 그렇다. ‘국회 비준을 받아야 한다’는 대세주자 문재인의 발언은 책임회피 그것이었고, ‘도로 가져가라’는 심상정의 대찬 일갈은 대책 없는 것이었다. 안철수와 유승민 후보는 ‘돈 낼 일은 없을 것’이라 못박았지만 돈을 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좌충우돌 홍준표는 조금 그럴듯해 보였다. ‘칼빈슨호 함상에서 트럼프와 만나 일괄 타결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어디서 본 듯한 정치 영웅의 연출을 빌려 왔다. 장사꾼을 대적할 배짱이 느껴진 발언이었지만 홍준표가 저 맹수 우리에서 살아 돌아올 것 같은 확신은 들지 않았다. 소인왕국의 대장 뽑기 대회에서 난무한 호언장담은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관의 한마디보다 미약했다. “칼빈슨호는 2시간이면 북한을 초토화할 수 있다.”


중국에 뺨 맞고 미국에 돈 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 없어 나 홀로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대선정국 토론회다. 그럼에도 각 진영은 표심 동향에 신경줄을 놓지 못한다. 트럼프의 파렴치한 비용청구서가 사드 필수론을 주장해 온 보수후보 지지층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철통 안보에는 돈을 낼 수밖에 없다는 수용론자와, 그럴 바엔 득실을 따져보자는 실속파, 자존심이 무척 상한 분개파로 쪼개질 조짐이 커졌다. 실속파와 분개파가 보수진영을 떠난다면 최대 수혜자는 사드 재협상론자 문재인, 그다음은 조건부 수용자 안철수다. 느닷없이 불어닥친 트럼프 태풍, ‘트풍(風)’이 사드 원칙적 반대론자 문재인의 입지를 넓혀준 건 이번 대선의 최대 아이러니로 기억될 것이다.

대선까지 정확히 일주일, 트풍이 보수 표심을 교란하고, 평양의 미사일 위협에 60~70대의 안보 열병이 덧나도 현재의 대선구도가 확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안철수가 홍찍문(홍을 찍으면 문이 된다)을 아무리 외쳐도 ‘어리바리’ 이미지에 표가 갈 것 같지 않고, ‘얼렁뚱땅’ 문재인이 대충 얼버무려도 ‘분노의 표심’이 그를 떠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19대 대선의 뇌관은 안보보다는 화난 국민, 즉 ‘분노한 민심’이다. 분노가 바닥에 깔렸다. 양극화, 좌절, 체념사회에 대한 분노. 문재인이 아무리 흐릿한 말을 해도 그가 분노를 대변한다고 믿는 관념이 이미 두텁게 형성됐다. 

10년 보수정권의 실망감, 이게 대선 판의 밑그림인 걸 어찌하랴.

이 밑그림을 바꿀 시간적 여유가 없는 ‘허둥지둥 대선’에서 정책공약을 눈여겨볼 유권자도 그리 많지 않다. 정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시간이 넉넉해도 유권자들은 정책공약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공약이 아니라 후보의 이미지다. 자신의 욕망에 맞는 자기 예언적 상징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 미국과 영국에서조차 공약 때문에 지지후보를 바꾼 비율은 10%도 지나지 않고, 특정 정책이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식별하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의 경우 다섯 후보가 쏟아놓은 정책 메뉴를 일일이 간별해 투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컨대 ‘기초연금 모두에게 30만원’과 ‘하위 80%에게 30만원’이 무슨 표심의 차이를 가져올까. ‘촛불의 분노’와 ‘태극기의 분노’를 누가 잘 대변할까, 이게 19대 대선의 최대 화두다. 정책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기대와 이미지다. 여기에 사드로 상징되는 안보 열병이 살짝 가세했을 뿐이다. 분노는 트풍보다 힘이 세다.


그런데 이런 표심으로 출현할 정권은 과연 ‘모든 국민’의 열망에 화답하는 ‘책임 정부’일까? 민주주의 이론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론을 배반한다. 역대 최다 득표 박근혜 정권이 그랬다. 이번에는 역대 최소 득표 당선자다. 더욱이 국운이 걸린 중대 사안을 좌우할 실세들은 후보 뒤에 익명으로 숨어 있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른 채 일주일 후 투표소에 줄을 설 것이다. 누가 되든 책임 정부와는 거리가 멀다.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