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는 정산보다 청산 유전자가 너무 강해 문제다
보수는 진보를 청산했고 진보는 보수를 일소했다
이제 극단적 상승과 추락 대신 관용과 성공한 정치 보고 싶다
그 시각, 남쪽 봉하마을엔 상처를 치유받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치다 결국 뇌물죄로 몰려 마지막 남은 출구로 몸을 던진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는 자리는 눈물이었다. 8년을 쏟아내고도 다시 고이는 통한의 눈물이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검찰청 포토라인에서 잡범 취급을 받은 그 수모를 원망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의 말대로 ‘운명’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닥치는 역풍, 이념 불화가 초래한 사화(士禍)적 스토리의 상징인 부엉이바위에 대통령이 된 문재인이 다짐했다.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고, ‘그리운 당신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진보든 보수든 성공한 정치를 보고 싶다. 상승과 추락의 극한적 부침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지금부터 몇 년 후, ‘그대의 찬 손’에 불에 덴 듯 상처를 입고 전임자를 잡범 취급한 정권을 다시 절벽에 세우는 원억(冤抑)의 정치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통치자가 법치의 쇠망치에 맞아 파멸하는 한국 정치의 천형(天刑)이 문재인 정권에서 막을 내렸으면 좋겠다. 전(前) 정권의 행보를 초토화하고 전임자를 유배해야 하는 이 처절한 운명적 형식 말이다.
원망을 해소해 갈망의 꽃을 피워도 운명적 역풍에 핏물처럼 낙화하는 애증의 교차에 ‘그대의 찬 손’이 있다. 헌재가 이미 탄핵한 통치자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려 병합 심판을 명령한 ‘법의 정의’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데 저 운명적 형식이 여전히 어른거려 불안하다. 반복되는 파멸의 정치가 개막 팡파르를 신나게 울리는 새 정권에 스며들지 모른다는 불가항력적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다.
8년 전 5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포토라인에 섰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필자는 이렇게 썼다. “국민의 명예와 정치의 품격이 달려 있는 소환 문제를 검찰의 성곽에 무작정 던져두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닙니다… 정치란 우리 모두를 법의 수인이 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국민의 자존심과 통치자의 명예를 동시에 구제하는 방식에 대한 고통이 필요합니다”라고 (2009년 5월 5일자). 정권은 외면했고, 결국 자신에게 내린 사망선고가 스스로 자존을 수호하게 했다. 생명 공양(供養)이 인당수 물갈퀴를 거뒀다.
박근혜는 국민의 자존도 자신의 명예도 지키지 못했다. 지킬 능력이 없음이 판명된 전(前) 통치자에게 법(法) 실증주의는 무엇을 구제하려 하는가. 품격 있는 회오(悔悟)? 아니다. 오직 남은 것은 연민, 언론 카메라에 수십 번 비춰질 초췌한 모습과 나약한 항변, 그리고 아버지 시간으로 나 홀로 망명했던 ‘나대블츠, 503번 수인’, 그대의 찬 손.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其他 > 송호근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호근 칼럼] 제국의 오디션 (0) | 2017.06.28 |
---|---|
[송호근 칼럼] 무결점 인재는 없다 (0) | 2017.06.14 |
[송호근 칼럼] '광화문 시대'로 출근하는 대통령 (0) | 2017.05.17 |
[송호근 칼럼] 분노는 '트풍' 보다 힘이 세다 (0) | 2017.05.02 |
[송호근 칼럼] 항모와 미사일 사이, 국가는 없다 (0) | 2017.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