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17)소악후월(小岳候月)

바람아님 2013. 9. 10. 09:26

(출처-동아일보 2002-08-01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뜨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겸재가 이런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동복현감을 지내다 스스로 물러나 소악루 주인이 된 이유(李a·1675∼1757)는 겸재보다 한 살 위인 동년배인데 율곡학파의 조선성리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이자 아름다운 생활환경을 즐길 줄 아는 풍류문사였다.

당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술과 시문 서화를 사랑하니 사람들은 그를 ‘강산주인(江山主人)’이라 불렀다. 따라서 그와 사귀던 인사들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거나 최고의 풍류문사였다.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1682∼1751)과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1681∼1767)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로 불리던 당대 율곡학파의 최고 거장들이다. 이유는 이들과 친해 사람의 성품과 동물의 성품이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는 일을 함께 의논할 정도였다.

그리고 진경시(眞景詩)의 최고봉인 사천 이병연(쏏川 李秉淵·1671∼1751)은 시정(詩情)을 공감하는 시우(詩友)였다. 그런데 이병연은 겸재와 평생 뜻을 같이한 둘도 없는 지기(知己)였다. 그러니 강산주인으로 불리던 이유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와 친분을 맺지 않았을 리 없었다.

소악루가 
양천현아(陽川縣衙) 지척에 지어진지 불과 2, 3년 후에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것은 이런 친분 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소악루를 짓고 나서 어느 때 이유가 사천과 겸재를 초대했고 이때 겸재와 사천은 이곳 경치에 매료되어 그 일대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작정했던 듯하다.

이 사실이 ‘문화군주’인 영조의 귀에 들어가자 영조는 그림 스승인 겸재를 6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양천현령으로 발령내 그들의 소원을 이루게 했다. 그래서 남겨진 것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비롯한 한강 일대의 진경산수화들이다.

문화절정기를 이끌어 가는 최고 통치자의 문화의식이 어떻게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겸재는 소악루에서 달맞이하는 정경을 모두 한 화폭에 담기 위해, 소악루를 근경으로 잡고, 달떠오르는 한강 상류를 원경으로 잡았다. 그러자니 소악루 뒤편 성산 위에서 소악루와 한강 상류를 바라보는 시각이 될 수밖에 없다.

솔숲이 우거진 성산 등성이 아래에 소악루 건물이 큼직하게 지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 잡목 숲이 우거져 있다. 저 아래 강변에는 거목이 된 버드나무 몇 그루가 늘어진 가지들을 탐스럽게 풀어 헤쳐 푸름을 자랑하는데 둥근 달은 남산 너머 저쪽 광나루 근처에 둥실 떠 있다.

달빛에 숨죽인 어둠이 강 건너 절두산 절벽을 험상궂고 후미지게 만든 다음 선유봉, 두미암, 탑산 등 강 이쪽 산봉우리들을 강 속으로 우뚝우뚝밀어 넣고 있다. 강물을 갈라 놓은 긴 모래섬이나 강변의 모래톱도 달빛에 비쳐 날카롭게 강물 속으로 파고든다.

소악루와 본채 등 큰 기와집들은 숲 속에서도 그 위세가 당당하지만 그아래 초가집은 그대로 달빛어린 숲 그늘에 파묻힌 느낌이다. 이런 대조적인 표현이 보름달 뜨는 밤 소악루 주변의 경치를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가게 했다.


영조 17년(1741) 비단에 채색한 23.0×29.2㎝ 크기의 작품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소악루에서 달맞이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이병연의 시가 있다.(아래 그림 참조)


    파릉(巴陵)에 밝은 달 뜨면 

    이 난간에 먼저 비친다.

    두보(杜甫)의 제구(題句) 없는 것, 

    끝내 소악루를 위해서겠지.


  교교한 달빛에 잠긴 양천 강변의 밤 경치를 그린 정선의 그림에 부친 시다.

  뒷산인 파산에서 조감하여 오른쪽에 양천의 탑산, 두미암, 선유봉이 차례로 솟아 있고 

  대안의 절두산이 근경으로 보인다. 이병연은 파릉(巴陵, 양천의 별칭)의 달밤 풍경을 

  노래하면서 자신을 두보에 비유하는 등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내보이고 있다.




(그림의 제목과 연관지을 수 있는 두보의 시 소개)


登岳陽樓(등악양루)- 악양루에 올라

 - 두보가 57세(768년) 때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


< 원문과 현대어 번역>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   옛날 소문으로 들었던 동정호 (절경을)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   이제야(보기 위해) 악양루에 오르네.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오나라 초나라가 동으로, 남으로 갈라졌고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여기에) 떠있네.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친지와 벗에게 (소식) 한자 없고

老去有孤舟(노거유고주)   늙어가는 몸 외로운 배에 있네.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전장의 말은 관산 북쪽에(아직도) 있으니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난간(악양루)에 기대 눈물을 흘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