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남해 바다의 잇단 승첩, 전국에 義兵 물결 일으키다

바람아님 2017. 5. 18. 08:54
조선일보 2017.05.17. 03:06

[이순신 리더십] [19]
왜군에 대한 공포로 떨던 山河.. 남해의 勝戰 소식에 떨쳐 일어나
의병들 곳곳에서 항전 시작하고 전라우수영도 해전에 뛰어들어
승리에 도취하지 않은 충무공은 한산도로 水營 옮겨 乾坤一擲
송우혜 소설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1592년)에 이순신 함대는 경상도 바다에 4차례 출동해 일본 수군과 싸웠고, 싸울 때마다 승전했다. 전투가 있었던 날은 다음과 같다. 제1차 출동 : 5월 7일~8일(옥포해전·합포해전·적진포해전). 제2차 출동 : 5월 29일~6월 7일(사천해전·당포해전·제1차 당항포해전·율포해전), 제3차 출동 : 7월 8일~7월 10일(한산대첩·안골포해전). 제4차 출동 : 9월 1일(부산포해전).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뒤 조선군이 모두 지리멸렬하게 계속 무너지자 일본군에 대한 공포심이 극도에 달했다. 이때 돌연 큰 굉음처럼 우렁차게 천지를 뒤흔들면서 들려온 게 전라좌수영 이순신 함대의 승첩(勝捷) 소식이었다. 이순신 함대가 경상도 바다에 출동해 승첩을 거둔 소식에 고무된 이들이 의병이 되어 도처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출동을 머뭇거리며 지체했던 전라우수영 함대도 큰 힘을 얻었다.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이순신 함대의 제1차 출동에 합류하지 않다가 이순신 함대가 제2차 출동에서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을 치른 뒤인 6월 4일에 합류했다. 당항포해전에 출격하려던 전라좌수영 함대가 전라우수영 함대가 오는 것을 보았을 때의 모습을 쓴 이순신의 장계(狀啓) 구절은 지금 읽어도 새삼 눈물겹다. "막 배가 출발하려 할 때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신(臣)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와서 모이니 여러 전선 장수들이 우리가 외롭고 세력이 약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연속되는 전투에 바야흐로 곤고해진 무렵이라서 우리와 합류하려고 온 함대를 보고 춤추고 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당포파왜병장')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억기 함대의 합류로 당항포해전부터는 두 배 증가한 전력으로 일본 수군과 싸웠다. 해전의 백미는 7월 8일 벌어진 한산대첩이었다. 이 전투는 적의 대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낸 이순신이 학익진법(鶴翼陣法·학이 날개를 크게 펼친 모양의 진으로 적을 침)을 활용하여 역대 최고 승첩을 올린 걸로 유명하다. 조선 수군은 한산대첩과 이틀 뒤에 벌어진 안골포해전에서 모두 학익진으로 적을 쳤다.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신은 수군을 거느리고 학의 날개처럼 벌리고 앞서 나가며 경상우수사는 신의 뒤를 따라오게 하고"라고 기록돼 있어, 모든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웠던 그의 장렬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한산대첩 이후 조선의 남쪽 바다가 완전히 변했다. 두려움 없이 바다를 마구 횡행하며 공격과 납치와 약탈을 일삼던 일본 수군이 크게 위축돼 조선 수군을 만나는 것을 심히 두려워하며 피하게 된 반면, 조선 수군은 출동할 때마다 기세등등하게 일본 수군을 수색 공격하며 일본 전선들을 가차없이 깨뜨렸다. 조선 수군은 제1차 출동에서 적선 42척, 제2차 출동에서 적선 67척, 제3차 출동에서 적선 76척을 깼다. 그런 조선 수군의 실력과 힘에 놀라고 심한 고통을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지침까지 내렸다. 조선군 함대는 제4차 출동에서 9월 1일에 부산포까지 진격해 적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이때도 적은 대중소 470여 척 전선을 갖고도 조선 수군에 당당하게 수전으로 대적하지 못하고 배를 해안에 둔 채 모두 육지에 올라가 총포와 활을 쏘아댔다. 이때 조선 수군은 적선을 100여 척 깨뜨렸다. 다음 해인 선조 26년에는 2월 1일부터 3월 6일까지 5차례에 걸쳐서 계속된 웅천전투의 승첩이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화려한 승첩들이 갖는 전략적 효과를 뛰어넘는 거대한 도전과 도약이 바로 임진년 이듬해인 선조 26년 7월에 이루어졌다. 이순신이 경상도 바다의 섬 한산도로 본영을 옮기는 특단 조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조정의 승인을 요청한 것이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서 적군의 본거지인 부산포 쪽에서 전라도 바다를 향해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간 5차에 걸친 출동 때마다 전라좌수영이 있는 전라도 여수와 경상도 바다를 오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전력과 시간 낭비를 줄이고 좀 더 확고한 길목 차단 효과를 얻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본영 이전 요청 시기가 비상했다. 일본군 9만3000여 명이 공격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며 6만 명의 백성과 많은 무장이 처참하게 몰사한 것이 6월 29일이었다. 이순신은 눈앞에 보이는 조선의 참담한 역경에 전혀 굴하지 않고 경상도 바다 깊숙이 들어간 곳에 본영을 설치하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전쟁의 전체 국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안목이 아니면 불가능한 결단이었다. 선조는 그의 장쾌한 계책과 담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7월에 이순신의 요청이 승인돼 한산도에 전라좌수영 본영이 설치됐다. 선조는 8월 15일에 그를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해 전체 수군을 통솔할 최고 지휘관의 권능과 자격을 부여했다. 그럴 만큼 중요한 인재라고 판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