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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8) 성종의 문화 참모 '성현' 악학궤범·용재총화 쓴 학문·예술 팔방미인

바람아님 2017. 5. 16. 16:21
매경이코노미 2017.05.15. 08:28
1469년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成宗, 1457~1494년, 재위 1469~1494년)이 13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왕의 계승 순위에서는 넘버 3의 위치였지만, 장인 한명회의 영향력 속에 대비인 정희왕후의 지원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즉위 초반에는 대비의 수렴청정을 받기도 했지만, 호학(好學) 군주 성종은 학문적 능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왕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나갔다. 성종은 세조대에 추진했던 ‘경국대전’ ‘동국통감’의 편찬 사업을 완성함으로써 조선 전기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성종의 묘호(廟號)가 이룰 ‘성(成)’ 자를 쓰는 ‘성종(成宗)’인 배경이다.


성종은 선왕인 세종처럼 인재 등용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세종에서 세조 시대를 거치면서 국정 경험을 쌓은 학자들을 최대한 중용했다. 이 결과 성종 시대에는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등 쟁쟁한 학자들이 배출됐다. 특히 ‘악학궤범(樂學軌範)’의 편찬을 주도한 성현(成俔, 1439~1504년)은 성종을 음악과 학술 분야에서 보좌한 대표적인 참모였다.


▶세조부터 연산군 시대 거친

▷학자이자 예술인이었던 성현

성현은 1439년 세종 때 태어나 세조부터 연산군 시대를 살아간 학자이자 예술인이다. 자는 경숙(磬叔), 호는 허백당(虛白堂), 용재 등 다양하게 사용했고, 시호는 문대(文載)다. 본관은 창녕으로, 고조부 성여완은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냈다. 성여완은 석린, 석용, 석인의 세 아들을 뒀다. 성석린은 조선 건국에 참여한 후 태종 때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함흥차사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성석용이 대사헌, 성석인은 판서직을 지내는 등 조선 초 명문가의 위상을 지켰다. 조부는 성엄이며, 부친 성염조는 도승지, 형조참판 등을 거쳐 관직이 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하지만 성석용의 손자인 성승은 아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삼문, 삼빙, 삼고, 삼성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해 후사가 끊어졌다.


성현은 1439년 지중추부사를 지낸 성염조와 순흥 안씨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외가인 순흥 안씨 또한 명문가로 어머니는 성리학을 처음 고려에 들여온 안향의 손녀. 성현의 부인은 한산 이씨로 고려 말 대학자 이색의 현손녀였다. 12세에 부친상을 당한 후, 18세 나이 차가 나는 큰형 성임에게서 수학했다. 어린 시절 형의 친구들인 김수온, 강희맹, 서거정 등을 만나면서 이들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성종대 훈구파로 분류되는 학자들로서 성종을 보필해 학술 편찬 사업의 완성에 공을 세웠다.


1459년(세조 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2년 23세 나이로 식년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진출했다. 세조대 소장관리로서 홍문관, 예문관 등에서 주로 근무했으며,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경연관에 발탁됐다.

성현이 관료로서 꽃을 피운 시기는 성종 때였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진하사로 임명된 형 성임을 따라 명나라 베이징으로 가는 기회를 얻었고, 기행시 ‘관광록(觀光錄)’을 남겼다. 1475년(성종 6년)에는 한명회의 종사관이 돼 재차 베이징에 다녀왔는데, 중국으로의 사행 경험은 그의 학문에도 큰 영향을 줬다. 1475년 11월 음악을 관장하는 부서인 장악원 첨정(僉正)에 임명된 것 또한 운명적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발판 삼아 장악원 제조에 이르렀고 이는 ‘악학궤범’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이후 홍문관, 사간원, 승정원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성종의 총애를 얻어 1480년에는 우승지에 올랐다. 1481년 인사권을 잘못 행사한 죄로 잠시 파직됐다, 1482년 복직해 형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485년 천추사가 돼 다시 중국을 다녀왔으며, 1488년(성종 19년) 2월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당시 성현의 시가 명나라 사신들을 탄복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같은 해 7월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돼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는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에 이어 예조판서가 됐다. 당시 유자광은 “경상도 관찰사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장악원의 제조는 성현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라며 성현의 음악적인 자질을 높이 평가했다. 결국 성현은 예조판서와 장악원 제조를 겸직했다. 성종과 성현의 인연은 성종 사후 빈전도감 제조로 상례를 주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연산군 즉위 후에는 한성판윤, 공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다. 그러나 1504년 1월 사망 후 7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를 당한다.


▶조선 초 음악도서 악학궤범 편찬

▷신변잡기 기록한 용재총화까지

다른 건 몰라도 음악과 예술 분야에 있어서 성현은 성종의 최고 참모였다. 성종은 성현에게 조선 전기 음악의 정리를 맡겼다. 마치 세종의 명을 받아 궁중음악을 정리한 박연의 관계와 유사하다. 예악일치(禮樂一致)를 표방한 유교 국가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중요했다.


장악원에 간수된 의궤(儀軌)와 악보가 세월이 오래 지나는 동안에 모두 해어지고 떨어져나가고, 다행히 남아 있는 것도 모두 소략하고 잘못되고 절차가 빠진 것이 많았다. 성현과 유자광, 신말평, 박곤과 김복근 등은 성종의 명을 받들어 음률을 만든 원리, 악기와 부속품의 형체와 그것을 제조하는 방법과 춤추는 것과 그 대열과 전진하며 후퇴하는 절차를 구비해 총 9권으로 구성된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성현이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었음은 그의 또 다른 저술 ‘용재총화’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예조판서로서 장악원 제조를 겸했다. 여러 나라의 사신을 위한 잔치를 베풀려면 악기에 익숙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그럴 때면 음악을 듣지 않는 날이 없었다. (중략) 나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판서에 이르러 밤낮으로 노랫소리에 묻혀 있으니, 어찌 이렇듯 태평한 음악을 혼자서 누린단 말인가.”


용재총화는 조선 전기 신변잡기에 관한 기록이다. 말 그대로 ‘총화(叢話)’로, 저자 성현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조선 초기, 공간적으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해 중국에 관한 사항까지 기록했다. 특히 용재총화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당대의 모습은 물론 그때까지 전해오던 이야기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성현은 평소 여러 책을 섭렵하고 여행하기를 좋아했으며, 네 차례나 중국에 사행하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용재총화에는 총 324편의 글이 10권에 나눠져 수록돼 있는데, 자유로운 형식 속에서 민간의 풍속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학문, 종교, 문학, 음악, 서화 등 생활과 문화 전반을 다뤘다. 특히 인물에 관한 일화는 용재총화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해 조선 전기 인물을 복원할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준다.


승정원, 집현전, 홍문관 등 주요 관청의 역사와 관청에 담긴 일화를 비롯해 과거제도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여러 풍속까지 세밀히 기록한 점도 돋보인다. 또한 궁중에서 행해지던 처용희(處容戱), 나례(儺禮·귀신을 쫓는 의식)를 비롯해 각종 흥미로운 내용이 줄줄이 나온다. 당대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걸러냄 없이 그대로 서술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관점을 견지해 생활상을 정확하고 역동적으로 보여준 점이 용재총화의 매력이다.


성현은 악학궤범 편찬을 주관하면서 성종의 대표적인 예술 분야 참모로 자리매김했지만, 용재총화를 통해 다양하게 당대의 모습을 전해줌으로써 시대의 증언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적인 편찬 사업을 책임질 만큼 큰 비중을 지닌 유학자였지만, 꾸며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풍속과 생활, 제도, 일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준 열린 관리이자 학자였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07호 (2017.05.10~05.16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