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連勝의 비결은 적탄을 무릅쓴 최전선에서의 솔선수범

바람아님 2017. 5. 11. 08:32
조선일보 2017.05.10. 03:07

[이순신 리더십] [18]
"벤 수급으로 戰功 산출 않고 힘껏 싸운 자 으뜸으로 친다"며
대장선 타고 선봉에서 지휘 도중 적 탄환에 어깨 뚫리는 큰 부상
수하 병사들 용사로 거듭나며 빛나는 해전 연승 신화 이어가
송우혜 소설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는 선조 25년(1592년, 임진년) 5월 7일에 거제도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과의 첫 싸움에서 승첩(勝捷)을 올린 뒤, 근처 바다를 수색하면서 일본 수군을 찾아내 계속 싸워 이겼다. 합포 승첩(5월 8일), 적진포 승첩(5월 8일)이 잇따랐다. 그러나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했다는 소식이 오자 온 장병이 통곡한 뒤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순신은 제1차 출동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 싸움에서 적 함선 42척을 쳐서 깨뜨리고 불태웠으며, 획득한 적의 물자는 5칸 창고를 가득 채웠다. 이순신 함대가 다시 경상도 바다로 출격한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 이루어졌다. "일본 수군이 경상우수영 관할 바다를 깊이 침범하고 있다"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새로운 구원 요청에 따른 출동이었다. 이때도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가 미처 오지 않아서 전라좌수영 함대만의 외로운 출격이었다. 그 위험한 비상 시기에 그런 상태로 다시 출동했다는 사실은 이순신이 갖고 있던 담대함의 크기가 어떠했는가를 드러낸다.


여기서 바로잡을 일이 하나 있다. 임란 시기에 조선과 일본 전함의 크기와 전법에 관한 문제다. 현재 많은 연구자가 "조선의 전함은 중후장대(重厚長大)하여 튼튼했지만 느렸고, 일본 전함은 크기가 작고 나무가 얇아서 속력이 빨랐다. 그래서 서로 부딪치면 으레 일본 전함이 깨졌기 때문에 이순신의 수군이 계속 이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순신의 '임진장초(임란 시기에 임금에게 올린 장계 초본)'에 적혀 있는 양국 전함의 크기와 싸운 방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와 싸운) 왜선은 크기가 판옥선만 한 것 9척 중간 배 4척 작은 배 13척…"('당포파왜병장')이라고 하여 대형 일본 전함은 판옥선(대형 조선 전함)과 크기가 같았다는 것이다. 전법도 그렇다. 이순신이 직접 기록한 전투 상보를 보면 '적선을 쫓아가서 부딪쳐서 침몰시킨 것'이 전혀 아니다.


 화포와 총포와 불화살과 화살 등을 쏘아서 적선을 깨뜨리고 침몰시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게 마땅하다. 당시 전함은 나무로 만든 목선이었다. 전함으로 전함을 들이받아 침몰시킨다면, 당연히 들이받은 전함도 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들이받아서 적함을 침몰시키는 것은 가능한 전법이 아니다. 더구나 일본 전함은 작고 가볍고 빨랐다면서 어떻게 크고 무겁고 느린 조선 전함이 쫓아가서 들이받을 수 있었겠는가. 이순신이 직접 싸운 전쟁이었는데, 후세인들이 그의 생생한 증언을 무시하고 가당치 않은 말을 만들어서 그의 전쟁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계속 일본 수군을 박살 내면서 이순신은 전투 외적으로 생긴 큰 곤경에 계속 시달렸다. 군사들의 전공(戰功) 평가에 관한 문제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전공은 '적의 수급(首級)을 얼마나 확보했는가'로 평가됐다. 그러나 이순신은 첫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수전의 양태와 속성 때문에 생길 문제를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 대책을 확고하게 세웠다. 그는 출동 전에 전체 군사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적을 쏘아 죽인 뒤 그 머리를 베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머리를 벤 자가 아니라 힘껏 싸운 자를 으뜸가는 공로자로 하겠다!" 그는 자기 말을 확고하게 실행했다. 수전의 특성상 군사마다 자신이 쏘아 죽인 적이 바닷물에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시체를 건져서 머리를 베어 간직하려고 들면 전체적인 전투의 흐름과 양상에 치명적인 무리가 빚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부하들에게만 그렇게 다짐한 게 아니다.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도 자신이 그런 방식으로 군사를 통솔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밝혔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의 방식을 증오했다. "명나라 장수치고 천자에게 전공을 속이지 않는 자가 없다"면서 "전공은 적의 수급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거듭 강요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굽힘 없이 자신의 소신을 실행했다. 임금과 그런 갈등을 계속하는 것은 그에게 매우 심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오랜 역사적 전통과 임금의 완강한 강요. 보통 장수라면 그중 하나도 물리치기 어려운데 이순신은 둘 다 과감하게 물리치면서 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처럼 우수한 진취적 전략을 뛰어넘는 그의 위대함은 따로 있었다. 바로 '솔선수범'이다. 선조 25년 5월 29일에 그의 함대가 제2차로 경상도 바다에 출격해 거둔 사천 승첩 당시 이순신은 적탄에 왼편 어깨를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는데 빨리 낫지 않아 크게 고생했다. 그의 부상은 눈부시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하다. 그의 대장선이 안전한 함대 뒤에 머물면서 전투를 지휘한 게 아니라 그가 함대 앞에서 몸소 싸우면서 전투를 이끌었음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그가 겁 많고 유약한 수하 군사들을 강하고 용감한 용사로 만든 비결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