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관리소의 직원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함녕전 꽃계단에 모란이 만개했습니다. 이번 주말엔 덕수궁에 오셔야 볼 수 있어요. 올해는 일찍 개화해서 벌써 지려고 해요. 지난번에 석어당 앞 살구나무 꽃도 만개한 다음에 오셨잖아요.”
내가 꽃나무를 좋아하여 철 맞춰 찾아가는 것을 잊지 않고 알려주는 옛 직원의 정성 어린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가보긴 가봐야겠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모란이 지기 전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지난 4월에 내가 덕수궁에 간 것은 살구꽃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석어당을 다시 보러 간 것이었다. 석어당은 덕수궁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아주 예외적인 건물이다. 본래는 성종의 형님인 월산대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온 뒤 경복궁, 창덕궁이 모두 소실된지라 이 건물을 임시 궁궐로 삼아 여기서 15년을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옛날에 임금이 살던 집이라는 뜻으로 석어당이라 부르고 이를 계기로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이 여기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덕수궁 답사기를 쓰기 위해 <고종실록>을 살펴보다가 1893년 10월4일에 고종이 대신들을 이끌고 이 석어당에 다녀간 기사를 보고 가슴 뭉클하게 하는 바가 있어 다시 찾아갔던 것이었다. 우리의 역사적 기억 속에 1593년은 특별한 해가 아니다. 그러나 고종의 기억과 마음은 달랐다. 이때의 일이 <고종실록>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생각건대 선조대왕이 다시 환어하신 것은 계사년(1593) 10월의 일이다. (…) 그해가 육십갑자로 다섯 번 돌아와 300년이 되었다. (…) 공손히 건물을 바라보노라니 어찌 지난날을 슬퍼하는 마음을 금할 수 있겠는가? 기꺼이 신민들과 더불어 선조대왕의 (국난을 극복했던) 덕을 계승하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리는 바이다. (…) 묵은 때를 깨끗이 씻어내고 모두 함께 새로워지고자 은혜를 베풀어 이달 4일 새벽 이전의 죄인으로 죽을죄를 지은 자를 제외하고 모두 사면한다.”
외세에 시달리던 고종이 비슷한 처지의 선조를 기억하며 역사에서 위로받고자 했던 그 모습이 나를 숙연케 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고종은 국난 극복의 의지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은 고종의 편이 아니었다. 대사면령을 내린 지 불과 두 달 뒤, 해가 바뀌어 1894년이 되자마자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고 뒤이어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지만 새로 들어선 친일내각을 통한 일본의 압력이 거세지자 고종과 왕비의 지원을 받는 대신들은 러시아 등을 통해 이를 제어하고자 했다. 이에 일제는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왕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고종은 4개월 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896년 2월11일 새벽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단지 일제로부터 몸을 피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종은 즉시 친일내각의 총리와 대신들에게 포살령을 내려 총리대신 김홍집과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군중에게 타살되었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붕괴되고 박정양의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사면령을 내리면서 민심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뒤인 1897년 2월20일 경복궁이 아니라 석어당이 있는 경운궁으로 이어했다. 그때 고종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렸다.
“지난번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덧없이 한 해가 지나갔다. (…) 실로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왔음을 모든 신민들이 알 것이다. (…) 그러나 이제부터 관리들은 맡은 바 일을 한결같은 몸과 마음으로 다하자. (…) 비유하건대 배를 같이 타고서 건너갈 때 상앗대로 노를 젓는 것처럼 각각 그 힘을 써야 무난히 건널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느슨해지면 곧 빠지게 되는 경우와 같다. (…) 함께 건넌다는 마음으로 조금도 해이해지지 말지어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심기일전하여 독립된 제국으로 나아갈 뜻을 굳게 갖고 있었다. 환어한 지 4개월 뒤인 1897년 윤5월20일 환구단의 건설을 명하여 10월11일 완공되자 하늘에 제사 지내고, 10월12일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13일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연호는 광무(光武)라 하며 이를 만천하에 공표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50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은 13년 만에 일제에 강제 합병되었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고종황제는 근대적 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이른바 ‘광무개혁’을 단행하였다. 기본 노선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전통을 기본으로 하면서 새것을 추구한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국방, 경제, 산업, 교육 등 많은 분야에서 근대화를 추진했다.
광무개혁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주장한 입헌군주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전제군주제로 나아감으로써 정치적으로 봉건성을 면치 못했던 것은 시대적인 한계였다. 그러나 근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식산흥업이라는 이름의 상공업 진흥정책을 펼치면서 황실 스스로 방직, 제지, 유리 등 기반산업을 조성했다. 철도, 전차, 전화 등 교통통신시설이 이때 가설됐다.
나아가서 1899년엔 대한제국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國制)’ 9개 조항을 발표했다. 1900년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하며 대한제국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1902년에는 에케르트가 작곡한 국가(國歌)를 만들고, 어기(御旗·태극기)도 제작했다. 혹자들은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일제의 강탈로 독자적인 근대화가 좌절되었을 뿐임을 광무개혁이 말해준다.
올해는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옛날식으로 말하면 2주갑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이날 이때까지 이를 기리는 사업을 볼 수 없고, 이를 각별히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다. 고종은 선조가 한양으로 환어한 지 5주갑 되는 것을 기린 것에 비하면 우리들이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닌가.
대한제국은 일찍 막을 내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실체를 역사의 기억으로 거의 간직하지 못하고 흔히는 구한말(舊韓末)이라고 부르면서 조선왕조가 1910년에 막을 내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끝까지 거부했고 1907년 헤이그 밀사를 통해 국제사회에 호소하려다 강제로 퇴위당하여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뒤를 이은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아버님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덕수’라는 칭호를 내려 그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고종은 홀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지냈다. 사람들은 막연히 고종이 석조전에 살았던 것으로 지레짐작하곤 한다. 그러나 석조전은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영국인 하딩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1900년에 착공하고 1910년에 완공하였으나 그때 고종은 황제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황실로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못하였다.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꿈과 좌절을 보여주는 물증인 셈이다. 고종은 여전히 함녕전에 머물며 늦둥이 덕혜옹주의 재롱을 작은 낙으로 삼고 지내다가 1919년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한이 서린 함녕전 뒤뜰 꽃계단엔 해마다 모란꽃이 대한제국의 잃어버린 꿈인 양 애잔한 화려함으로 피어나는데 올해는 유난히 일찍 만개했다는 소식이니 연휴에 갈 길 잃은 분은 이 함녕전 꽃계단의 모란꽃을 보면서 대한제국 건국 2주갑을 기려보는 것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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