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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7) 세조부터 성종까지 권력의 중심 '한명회' 최고 실세 무색하게 쓸쓸한 말년

바람아님 2017. 5. 3. 08:38
매경이코노미 2017.05.02. 09:28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노래에는 이런 소절이 있다.

“신숙주와 한명회, 역사는 안다.”

세간에는 여전히 신숙주와 한명회(韓明澮, 1415~1487년)를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듯하다. 특히 한명회는 계유정난 이후 성종대까지 5차례 있었던 공신 책봉에서 4번에 걸쳐 1등 공신이 됐고, 그의 위세를 보여주는 압구정(狎鷗亭)까지 더해지면서 호의호식을 누린 대표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그러나 간신, 칠삭둥이, 훈구대신 등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명회는 조선 전기 정국을 안정시키고, 두 딸을 왕비로 보내는 데도 성공한 노련한 정치가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한명회의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 사우당(四友堂)이다. 한기의 아들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다.

과거 시험에는 몇 차례 응시했으나 거듭 실패하는 등 젊은 날 그의 인생이 그리 순탄하진 않았다. 단종 즉위 후 젊은 시절 함께 산천을 유람하던 벗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접근함으로써 한명회의 정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단종실록’에는 당시의 정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권람은 수양대군을 만난 자리에서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범상하지 않고, 포부도 작지 않으나, 명(命)이 맞지 않고 지위가 낮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공이 만일 발난(拔亂)할 뜻이 있으시면 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한명회를 적극 천거했다. 이후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책사로 활약하면서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 등의 동선을 파악하고 홍달손, 양정, 유수 등 내금위 등에 소속된 무사들을 포섭해갔다.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발생했다. 한명회는 무사 30인을 수양대군에게 추천하고, 반대파 정치인을 파악해 정보를 제공하는 등 정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정난 후 수양대군, 정인지, 환확, 홍달손, 권람 등과 함께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 소윤에 올랐으며 이듬해 동부승지가 됐다. 1455년 세조 즉위 후에는 더욱 승승장구해 좌부승지에 오르고 좌익공신 1등에 책봉됐다.


1456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을 때, 한명회는 특유의 정치적 감각으로 이를 좌절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성삼문 등은 창덕궁에서 중국 사신을 맞아 연회하는 날을 거사일로 잡고 별운검(別雲劍·특별 경호원)으로 임명된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미리 행사장을 답사한 한명회는, “창덕궁은 좁고 무더우니 세자가 입시(入侍)하는 것은 불편하고, 따로 운검(雲劍)을 세우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세조에게 건의했고, 이것은 결국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끝이 나는 ‘신의 한 수’가 됐다. 1456년 가을 한명회는 좌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 병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됐다.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각별한 신임은 혼사로도 이어졌다. 1460년 한명회의 딸(후의 장순왕후)은 당시 세조의 세자로 있던 해양대군과 혼인했다. 차기 왕비가 보장됐으나, 1461년 17세 어린 나이로 사망하면서 왕비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세조와 사돈 관계를 맺으며 한명회는 더욱 권력을 공고히 했다. 1462년 우의정,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마침내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경덕궁직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9급 공무원에서 국무총리까지 오른 격이다.


세조는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한나라 고조의 참모로 장량이라고도 함)’이라 칭하며 그를 아꼈다. 1467년 이시애의 반란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되면서 잠깐 정치적 위기가 왔으나 곧 석방됐고, 1468년 세조 사망 후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돼 실질적으로 국정을 주도했다. 1468년 청년 장군 남이의 역모 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봉됐으며 1469년 성종이 즉위하는 데 막후 세력으로 활약해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올랐다.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시기 20년도 안 된 시기에 총 5번의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한명회는 4번이나 일등공신에 오르면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권력자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됐다.


1468년 세종이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한 후 정국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1467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구성군(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아들), 강순, 남이 등이 신주류로 부상한 것. 예종 즉위 후 신숙주, 한명회 등 훈구대신들은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떠오른 이들의 견제에 나섰는데, 이것은 ‘남이의 옥사’로 이어졌다. 옥사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던 한명회가 영의정으로 복귀한 것을 보면 당시 한명회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1469년 예종이 14개월의 짧은 왕위를 마치고 승하하며 성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한명회는 또다시 권력의 최고 실세임을 증명한다. 바로 자신의 사위인 잘산군(후의 성종)을 왕으로 올리는 데 성공한 것. 예종 사후 왕위 계승 1순위는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제안대군이었다. 하지만 4세의 제안대군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가 되기 어려운 상황. 이제 남은 인물은 세조의 맏아들로 요절한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맏아들 월산대군과 차남 잘산군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왕위는 월산대군에게 이어져야 했지만, 후계자는 13세의 잘산군으로 결정됐다. 


왕이 죽은 그날 바로 다음 왕으로 즉위하는 파격적인 조처도 이어졌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세조의 비 정현왕후 윤씨는 “원자(元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잘산군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에게 견주기까지 했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떤가”라며 신하들 의견을 구하는 방식으로 잘산군은 왕에 오를 수 있었다. 딸을 왕비로 만드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써 한명회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한편 ‘한명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장소가 있다. 압구정이다. 현재는 한강변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촌의 대명사로 불리는 ‘압구정동’은 한명회가 세운 정자 ‘압구정’에서 유래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국가 원로가 된 한명회는 조용히 여생을 보낼 장소로 한강변에서도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에 정자를 지었다. 중국 송나라 재상이었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머물던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이라 했던 고사에서 명칭을 따왔다.


압구정은 워낙 경치가 좋고 규모도 커 중국 사신들에게도 그 명성이 알려졌고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됐다. 하지만 압구정은 성종과 한명회의 힘겨루기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 사신이 방문해 압구정 관람을 청하자, 한명회는 성종에게 정자가 좁아 관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를 말릴 것을 청했다. 그래도 사신이 방문을 청하자, 한명회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왕이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성종은 좁다는 것을 핑계로 관람을 허락하지 않다가 왕의 차일을 요구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여겨 제천정에서 행사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한명회는 왕이 참여하는 제천정 연회에 아내의 병을 핑계로 나갈 수 없다고 버텼다. 사헌부의 탄핵이 이어졌고, 마침내 성종은 한명회의 추국(推鞫)을 지시했다.


갈매기로 벗을 삼아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한명회는 압구정을 두고 사위인 왕과 힘 싸움까지 했지만, 결국은 쓸쓸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성종이 한명회의 힘으로 왕이 된 ‘사위’가 아니라,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훈구대신까지 견제하는 조선의 ‘왕’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명회의 정치 인생과 말년의 모습에 대해서는 실록의 다음 기록이 잘 증언하고 있다.

“만년에 권세가 이미 떠나자, 빈객이 이르지 않으니, 초연히 적막한 탄식을 하곤 했다. 비록 여러 번 간관이 논박하는 바가 있었으나, 소박하고 솔직해 다른 뜻이 없었기 때문에 그 훈명(勳名)을 보전할 수 있었다.”

세조에서 성종 시대까지 끝나지 않은 한명회 시대를 연출한 권력가 한명회. 하지만 그의 말년은 쓸쓸했고, 그보다 더 큰 불운은 사후에 이어졌다. 1504년 갑자사화 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것. 한명회의 정치 인생을 보면 권력과 부귀영화는 모두 부운(浮雲·뜬구름) 같은 것임이 실감 난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05호 (2017.04.26~05.02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