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 1457~1494년, 재위 1469~1494년)은 조선 왕 중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다. 조선 전기 문물과 제도를 정비한 업적을 어느 정도 인정받지만, 대개 성종보다는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정창손 등 훈구파 대신의 이름이 왕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특히 성종 시대는 기존 훈구파에 대항해 새로운 정치, 사회 세력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김종직(金宗直, 1431~1492년)으로 대표되는 영남 사림파의 등장이 조명받는다. 물론 실상을 보면 성종이라는 왕의 정치적 리더십이 있었기에 조선 전기 문물과 제도 정비가 가능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훈구파 이외에 사림파라는 신진 세력의 적극적인 등용은 성종 시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사림파의 영수라 불리는 김종직은 어떤 활약을 펼쳤을까.
▶김종직은 누구?
▷조선 전기 사림파 우두머리
김종직은 1498년 무오사화의 단서를 제공하고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로 기억된다. 조선 전기 훈구파에 대항한 참신한 정치 세력 사림파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그에 대해선 ‘꼿꼿한 선비 학자’로 이해하기 쉽다. 김종직은 후배 사림파를 두루 배출해 조선 전기 영남 사림파가 정치와 사상의 중심에 서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김종직은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사림파의 학문과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1446년 과거에 낙방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그때 지은 백룡부(白龍賦)를 본 태학사 김수온이 “후일 문형(文衡)을 맡을 솜씨”라고 감탄할 만큼 명문이었다.
1453년 봄 진사시에 합격했고, 겨울에는 창녕 조씨와 혼례를 치렀다. 1456년 부친상을 당해 낙향해 여묘살이(무덤 근처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했는데, 이때 인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459년 문과에 합격한 후 중앙 관직에 진출해 승문원의 저작, 박사 등을 역임했으며, 왕실의 애책문, 옥책문을 지으며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1464년 8월에는 당시의 잡학을 비판하다 파직당했다. 김종직은 “지금 문신으로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시사(詩史)의 7학(學)을 나눠 닦게 하는데, 그러나 시사는 본래 유자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이야 어찌 유자들이 마땅히 힘써 배울 학이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이에 세조는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라며 관직에서 내쫓았다. 젊은 관료 시절부터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김종직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김종직이 본격 활약한 시대는 성종대였다. 성종은 즉위 후 집현전의 예에 의거해 예문관 인원을 늘려 문학하는 선비를 선발해 모두 경연관을 겸하게 했는데, 김종직은 수찬(修撰)에 선발됐다. 1470년 겨울 김종직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지방 관직을 자처했고, 함양군수로 나가게 됐다. 이때 관내 정자에 유자광이 쓴 시를 걸어둔 것을 보고 즉시 명해 불태워버리게 했다. 유자광과 같은 훈구파 간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훗날 유자광이 무오사화 때 김종직에게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함양군수 시절에는 향음주례(鄕飮酒禮), 양로례(養老禮) 등을 널리 보급하며 사림파로서의 입지를 실천해나갔다.
1475년 김종직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승문원 참교(參校)를 제수받았지만, 어머니가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선산부사로 갔다.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영남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등 훗날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1479년 어머니 상을 당해 고향인 밀양에 있을 때 인근에 있던 학자 김일손, 조위, 강혼 등도 찾아와 제자가 됐다. 3년상을 마치고는 왕명을 받고 다시 중앙으로 올라왔다. 이후 성종의 깊은 신임 속에 승진을 거듭해 홍문관 응교,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등 중앙 요직을 두루 거쳤다.
1485년 55세로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1486년에는 성종의 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다. 1489년 형조판서까지 제수받았으나, 신병이 심해져 사직하고 밀양 옛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성종은 김종직의 청빈함을 듣고 쌀 70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1492년 62세를 일기로 밀양에서 생을 마감했다.
죽은 김종직이 다시 역사 속으로 등장한 것은 1498년 연산군 시대에 발생한 무오사화 때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의 문인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이 수록된 것이 빌미가 돼 대규모 필화 사건으로 이어졌다. ‘조의제문’은 세조대인 1457년 김종직이 쓴 글로 초나라 항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조카 의제(義帝)를 조문한 글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으로서 사림파의 시각이 잘 드러난 글이다. 제자 김일손은 용기 있게 이 글을 사초에 실었다. 하지만 이 사초는 훈구파 대신인 이극돈과 유자광에 의해 실록의 기록으로 정리되기 전에 연산군에게 보고됐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가진 연산군은 이를 기회로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사건의 당사자인 김일손이 처형됨은 물론이고, 김종직의 문인인 영남 사림파 학자 상당수가 화를 입었다. 결국 문건 작성자로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원류로 인식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 희생은 역설적으로 훗날 김종직을 사림파의 영수로 널리 기억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약관 전에 신동으로 이름 떨쳐
▷성종시대 문물정비·성리학 발전 토대 마련
대개 사림파 학자라 하면 경서(經書)나 성리학 이론에 해박하고, 문장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김종직은 사림파가 중시하는 경학에 대한 식견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탁월한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성종 시대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큰 공을 세웠다.
‘점필재집’ 연보에 따르면, “김종직은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부터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날마다 수만 마디의 말을 기억해 약관이 되기도 전에 신동이라 알려졌다. 15세에 이미 시문에 능해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20세가 되지도 않았을 무렵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종직의 행적과 관련해 주목받는 것은 김종직이 신숙주의 문집 서문을 쓴 점이다. 훈구파 영수인 신숙주의 문집 서문을 사림파 영수 김종직이 쓴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국가적 편찬 사업에 참여한 인연 때문이었다.
신숙주 문집 서문에서 김종직은 무엇보다 신숙주가 궁벽한 시골 출신인 자신을 이끌어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그의 능력을 극찬했다.
김종직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기도 했지만, 15세기 성종 시대의 문물 정비에 힘쓴 참모형 관료였다.
하지만 그를 대변해주는 용어 중에서 ‘문장가’와 ‘관료’는 사라지고 ‘사림파’만 남은 것은 연산군 시대에 사화가 본격화되고, 그가 피화(被禍)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사림파 영수’ 외에도 김종직은 성종대 뛰어난 참모이자 조선 전기 문물 정비에 큰 공을 세웠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09호 (2017.05.24~05.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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