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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 탐하는 개로왕에게 월경 핑계 대고 도망쳐

바람아님 2017. 6. 5. 09:09
[중앙선데이] 2017.06.04 01:44

[추적, 한국사 그 순간] 도미 부인의 기지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서기 475년. 이 해는 백제 제21대 개로왕(蓋然性鹵王) 재위 21년째요, 고구려는 100세 장수를 누린 장수왕 재위 63년째가 되는 해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본기를 보면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들이쳐 그 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몰하고 백제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삼아 돌아왔다”고 돼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까닭에 왕족은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부여경이란 개로왕의 이름이다. 500년 사직이 거의 문을 닫을 위기에 놓인 백제는 신라의 도움을 얻어 허겁지겁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충남 공주 부근 웅진에 터를 새로 잡았다.
 
많은 죽음이 그렇듯이 한성백제의 최후 또한 비참하기만 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에 그 처참한 광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를 보면, 고구려군이 한성을 네 갈래로 나누어 포위하자 개로왕은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성문을 탈출해 도망가다가 사로잡혀 결국 지금의 서울 광진구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개로왕, 고구려군에 잡혀 참수
그런데 백제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린 적국 고구려군 수뇌부에는 뜻밖에도 백제에서 도망친 두 사람이 있었다.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개로왕은 참수 직전 이들에게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겪는다. 그것을 개로왕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제1등 관직)인 제우(齊于)와 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왕도 한성의) 북쪽 성을 공격해 7일 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자 성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지니 임금이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임금 얼굴에다가 세 번 침을 뱉고는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개로왕에게 치욕을 가한 재증과 고이는 복성(複姓, 다른 이름을 가졌다가 원래의 성으로 되돌아감)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본래 백제에서 어떤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쳐야 했는지 언급이 없다. 한데 그렇게 도망쳐 고구려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돌아온 그들이 개로왕을 사로잡은 뒤 침을 뱉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따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로서는 백제에서 대단히 억울한 일을, 그것도 개로왕에게서 직접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깊게 한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한때의 주군을 그리 대했겠는가.
 
같은 개로왕 시대, 재증·고이와 비슷한 운명을 걸어온 부부가 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고구려로 도망친 일은 같으나, 이들은 복수는커녕 비참한 최후를 맞은 점이 다르다. 『삼국사기』에 열전 형태로 그 행적이 정리된 그 유명한 도미(都彌) 부부가 그들이다. 이 열전은 도미라는 남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주인공은 그 부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도미는 개로왕 시대를 산 평범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에겐 매우 아름답고 지조가 있는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미모가 그만 비극의 씨앗이되고 말았다. 소문이 퍼져 나가 마침내 왕이 아내를 탐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 개로왕은 단순히 도미 부인의 아름다움을 탐한데 그치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게는 특유의 ‘여성 정절 파괴 본능’ 같은게 있었던 것 같다. 왕은 도미부인에 앞서 도미를 먼저 불러 이렇게 말한다. “흔히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친다지만 으슥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드물다”고 말이다. 제아무리 정절을 외치지만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왕이 부르는데 정절을 바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투였다. 개로왕은 그 정절을 거꾸러뜨리고 싶은 심리가 발동했던 것이다.
 
이런 개로왕이지만 막상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달이 난 그는 남편인 도미에게 죄를 덮어씌워 두 눈을 뽑아 버리고는 강배에 실어 강제 추방해 버렸다. 그러고는 기어이 부인을 불러다가 강제로 욕보이려 했다. 그러나 지혜로웠던 도미 부인은 이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도미 열전에 따르면 도미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남편을 잃어 혼자는 부지할 수 없는데다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제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이 몸을 씻고 오겠습니다.”
 
이 말을 곧이 믿은 왕은 그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미 부인은 그 길로 배를 타고 강물로 탈출해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풀뿌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장님이 된 남편과 극적으로 재상봉했다고 한다. 이후 부부는 배를 타고 고구려 땅 산산(䔉山)이라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구차하게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열전은 전하고 있다. 비장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엔 월경 중인 여성의 몸은 더럽다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온몸이 더럽다’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 ‘혼신오예(渾身汚穢)’다. 오예란 간단히 말해 오물(汚物)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소설 중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있는데, 예덕 선생이란 수도 한양에서 인분을 푸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을 극화한 표현이다. ‘예덕’은 글자 그대로는 ‘똥의 덕’이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떠오른다. 첫째, 월경을 지금 흔히 쓰는 용어 그대로 ‘월경(月經)’이라 했다. 둘째, 그러한 월경이 혼신오예라 해서 더러운 일로 인식됐다는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에도 그대로 전재됐지만 용어에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저 도미 열전을 그대로 베끼면서도 ‘월경’ 대신에 ‘월사(月事)’라는 말을 썼다. 이러한 용어 변경이 시대별 단순한 선호도 때문인지, 혹은 ‘월경’에 비해 ‘월사’라는 말이 덜 직설적이었다고 생각했음인지는 언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또한 월경 중인 몸은 더러우며, 그런 까닭에 그런 여자는 남자를 모시지 못한다는 스토리는 고대 일본 정사인 『일본서기』에도 보인다. 이곳 제7권 경행천황(景行天皇) 4년 봄 2월 갑자일(甲子日) 조에는 미농(美農)이라는 곳으로 행차한 천황이 이곳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추측되는 팔판입언(八坂入彦)이라는 황자(皇子)의 첫째 딸인 팔판입원(八坂入媛)을 만나 비로 삼게 된 사연이 흥미롭게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천황은 입원(入媛)의 동생인 제원(弟媛)을 먼저 만나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장막까지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제원은 막상 다음과 같은 말로 천황의 수청 요구를 거부한다.
 
“첩은 성격이 교접(交接)의 도를 바라지 않으니, 지금은 황명(皇命)의 위엄에 못 이겨 잠시 장막 안으로 들었습니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고 모습 또한 더럽고 누추해 오래도록 후궁에서 모실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첩의 언니 팔판입원은 얼굴이 아름답고 마음이 정결하니, 후궁에 넣게 해 주십시오.”
 
 
『일본서기』 형자예루도 월경의 은유
이에 마침내 그 언니가 천황비가 되었다고 한다. 모습이 추하고 더럽다는 말에 해당하는 『일본서기』 원문을 보면 ‘형자예루(形姿穢陋)’다. ‘형자’란 몰골이란 뜻인데 그것이 예루하다 했으니, 도미 열전에서 본 ‘오예(汚穢)’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형자예루’라는 말은 ‘월경 중’이라는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스토리는 ‘추적, 한국사 그 순간’ 의 제1편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2016년 6월 26일자)편에서 다룬 바 있다. 김유신이 처음에는 큰누이 보희를 김춘추와 짝지어 주려 했으나 그가 월경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작은누이 문희를 대타로 삼았다는 내용이었고, 이 대타 작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김춘추의 배필이 될 뻔한, 나아가 왕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한꺼번에 날린 보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를 짐작케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화랑세기』 18세 풍월주 춘추공 전에 보인다.
 
“(춘추와 문희가) 포사(鮑祀·포석정)에서 길례(吉禮·결혼식)를 치렀다. 얼마 안 있어 (김춘추 조강지처인) 보량궁주(寶良宮主)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풍월주 부인)이 되어 아들(법민)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일을 후회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았다. (춘추)공이 이에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김태식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