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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선조, 부산진공작전 성공을 오히려 징벌한 暗君

바람아님 2017. 6. 8. 10:25
조선일보 2017.06.07. 03:10

[이순신 리더십] [22]
"倭將 오는 길목 지켜 잡으라"
거짓 정보에 넘어간 선조의 명령 따르지 않았던 충무공, 뒤이은 부산 진공 명령은 이행
큰 승리 했는데도 분노한 선조.. 倭 소탕한 장군을 체포하고 압송
송우혜 소설가

이순신의 함대가 감행한 작전 중에 그런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매우 중요한 전투가 있다. 전투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승첩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전투가 훗날 이순신 체포 후 새 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의 진로와 전략과 멸망까지 결정지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정유재란 발발 초기였던 선조 30년(1597년) 2월 10일에 이순신 함대가 부산으로 진격해 12일까지 사흘 동안 부산 앞바다에 머물면서 일본군을 쳐부수었던 '부산진공작전'이다.


이 전투는 선조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명(明)과 일본 사이에서 진행되던 화의(和議)가 깨지고 일본의 재침공이 확실해지자, 선조는 이순신에게 무리한 일들을 요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무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수하 요시라의 반간계(反間計)에 넘어가 "일본 무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 오는 날을 알려줄 테니 조선 수군이 숨어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잡으라"고 한 계책을 따르라고 한 것이었다. 다음으론 "수군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 나아가서 왕래하면서 무위(武威)를 과시해서 일본군의 통행을 끊으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 수군 단독으로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지시였다. 


당시 원균은 그런 선조를 크게 부추겼다. 정유재란 발발 당시 원균은 전라병사(종2품)였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상관인 통제사 이순신의 불화가 극에 달하자 선조는 원균을 충청병사(종2품)로 임명(선조 27년 12월)했다가, 다시 전라병사로 임명(선조 29년 8월)해 전라도로 보냈다. 그렇게 육군이 된 원균이 정유재란 초기에 장계를 올려 "우리 수군으로 하여금 부산 앞바다로 나가서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대해(大海)에서 위세를 떨치게 하면, 가토 기요마사는 평소 수전에 불리한 것에 겁먹고 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2일) 운운했다. 선조의 마음에 꼭 드는 전략이었다.


/이철원 기자

"통제사 이순신이 요시라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서 가토 기요마사를 놓쳤다" 하여 선조의 극렬한 분노를 산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실상이 따로 있다. 당시 이순신은 일본 측이 파놓은 함정일 것이 확실한 요시라의 반간계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한산도 수군을 모두 이끌고 일본군 본거지인 부산으로 직접 쳐들어가 부산의 왜영(倭營) 자체를 쳐부수기로 결정했다. 그 작전은 현지에 주재하고 있던 도체찰사인 우의정 이원익도 동의했고 선조에게 보고돼 조정에 잘 알려진 상태로 실행됐다. 부산진공작전에 동원된 조선 수군의 규모에 대해서 두 가지 기록이 공존한다. 하나는 '전선 200여 척'(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 20일), 다른 하나는 63척(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 23일)이다. 앞의 것은 대형 전선과 중선과 소선을 망라한 숫자이고, 뒤의 것은 실제로 싸우는 대형 전함인 판옥선 수만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함대가 2월 10일 미시(오후 2시경)에 부산 앞바다에 도달했을 때, 부산 왜영의 일본 전선들은 전혀 맞서 싸우지 못했다. 배를 해안에 매어 놓은 채 육지에서 총을 쏘며 항전했다. 이순신 함대는 해안에 즐비하게 늘어선 빈 전선들에 총포, 화포, 불화살 등을 쏘아 불태워 없앴다. 부산 앞바다에서는 절영도밖에 배를 댈 곳이 없다. 이순신 함대는 밤이면 절영도 해안에 정박하고 해가 뜨면 왜영을 쳐부수는 전투를 사흘간 벌였다. 그런 정황은 이순신 함대가 일본 수군을 완전히 압도한 대승첩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순신 함대가 한산도 본영으로 귀영하던 중 가덕도 앞바다에서 마주친 왜적을 소탕하고 있을 때 선조가 보낸 선전관이 새 통제사로 임명된 전라병사 원균을 대동하고 달려와서 이순신을 체포하고 그들을 한산도 본영으로 데려가 통제사직의 인수인계를 시킨 뒤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했다. 체포되기 전에 이순신이 부산진공작전에 관한 치계(급히 보낸 장계)를 선조에게 올린 사실이 사료로 확증되는데 선조실록엔 실리지 않았다. 반면 이순신의 치계 내용을 부인하고 그 전투는 참담한 패전이었다고 모함하는 원균의 장계는 실려 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20일) 부산 전투 사실을 증명하는 사료들은 많다. 그런데도 많은 연구자가 현재 터무니없는 소리들을 하고 있다.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이라도 옳지 않으면 따르지 않았다. 정유재란 발발 초기에 너무도 무리했던 선조의 부산 진격 명령을 거부한 사실이 바로 이순신의 진정한 리더십을 증명한다"느니, "이순신도 부산에 진공하지 못했는데 원균에게 부산 진공을 명령한 것 자체가 잘못된 전략이었고, 당연히 원균이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느니 하고 크게 주장한다. 악의가 전혀 없는 부실한 연구도 역사 왜곡의 주요 요인임이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