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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10) 연산군 채홍사이자 최측근이었던 임사홍 영원한 간신으로 남은 국정농단의 주역

바람아님 2017. 6. 13. 10:11

매경이코노미 2017.06.12. 08:32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독재 군주 연산군(1476~1506년, 재위 1494~1506년)이 쫓겨났다. 연산군 폭정에는 왕 스스로의 자질도 문제였지만, 이를 보좌하는 참모의 역할도 결코 작지 않았다.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폭정에 기름을 부은 대표적인 인물은 임사홍으로, 역사는 그를 간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임사홍은 처음부터 간신이었을까?


임사홍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이의다. 성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좌리공신(佐理功臣) 임원준의 아들이다. 효령대군 아들인 보성군의 딸과 혼인해 왕실의 사위가 됐다. 임사홍은 자신뿐 아니라, 세 아들 중 두 명을 왕실의 사위로 만들었다. 첫째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해 풍천위가 됐고, 셋째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했다. 임사홍은 부마 집안 후광으로 성종대부터 권력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임사홍 집안이 왕실과 거듭 혼인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임숭재가 휘숙옹주와 혼인한 날 밤 임사홍의 집에 불이 나자, 사관은 “임사홍은 소인(小人)이다. 불의(不義)로써 부귀를 누렸는데, 그 아들 임광재가 이미 공주에게 장가를 가고, 지금 임숭재가 또 옹주에게 장가를 갔으니, 복이 지나쳐 도리어 재앙이 발생해 불이 발생했다”고 했다.

지금은 임사홍 하면 간신 이미지만 떠올리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세조대 과거에 정식으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에, 1466년(세조 12년)에는 사재감(司宰監)의 사정(司正)으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했다. 성종대 젊은 관리 시절에는 조정에 바른 소리를 잘하는 인물로 손꼽혔다. 당대의 권력가 한명회를 비판하기도 했고, 성종이 부친인 의경세자 추숭 작업에 몰두하자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시문과 서예 솜씨로 이름을 날렸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해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능력을 총애했던 성종은 임사홍이 종친임에도 불구하고 문관으로 등용해 도승지, 이조판서, 대사간 등 요직을 맡겼다.

성종의 총애로 탄탄대로를 걷던 임사홍은 1478년(성종 9년) ‘흙비’로 빚어진 사건 때문에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흙비는 지금의 황사비를 말하는데, 흙비가 심하게 내리자 사람들은 하늘의 변괴로 생각해 모두 두려워했다. 이에 사간원·사헌부·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도승지 임사홍 의견은 달랐다. 임사홍은 흙비를 재이(災異)로 여기지 않고 단지 운수가 그런 것이라 했다. 따라서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시점에서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성종은 임사홍의 생각에 동조했으나, 대간들 대부분이 임사홍을 비판하고 나섰다. 나아가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까지 탐오(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움)한 사람이었음을 언급하며, 가정교훈이 바르지 못했고 임사홍의 간사함은 내력이 있는 것이라고 몰아갔다.


임사홍이 성종의 지나친 총애를 받았다고 파악한 대간들의 탄핵이 이어지자, 성종 역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임사홍은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됐고, 임사홍의 당인(黨人)이었던 유자광도 동래로 유배를 갔다. 이후 유자광과 임사홍은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복수의 칼날만 갈았다. 희대의 간신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유배를 간 것도 역사의 운명이었을까? 이들은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화려한 복귀를 하게 된다.


연산군 즉위 후 임사홍은 정계로 돌아왔다. 그와 연산군을 이어준 인물은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 휘숙옹주였다. 연산군은 이복 여동생 가운데 휘숙옹주를 유난히 아꼈고, 임숭재와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연산군은 임숭재가 지방 출장을 갔다 돌아올 때 승지를 한강까지 보내 마중하게 하고, 잔치를 벌이거나 사냥을 할 때 꼭 그를 불렀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복수의 칼을 겨눴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100년이 지난 뒤까지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지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거론했다. ‘중종실록’에는 임사홍이 ‘폐비 윤씨의 죽음’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중심임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폐주(연산군)가 임숭재의 집에 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숭재가 말하기를, ‘신의 아비 또한 신의 집에 왔습니다’라고 했다. 폐주가 빨리 불러 들어오게 하니, 사홍이 입시해 추연히 근심하는 듯했다. 폐주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사홍이 말하기를, ‘폐비한 일이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이는 실로 대내에 엄(嚴)·정(鄭) 두 궁인이 있어 화를 얽었으나, 실제로는 이세좌·윤필상 등이 성사시킨 것입니다’라고 했다. 폐주는 즉시 일어나 궁궐에 들어가서 엄씨와 정씨를 죽이고, 두 왕자를 거제에 안치했다가 얼마 뒤에 죽여버리니, 두 왕자는 정씨의 아들이다.” (1506년(중종 1년) 10월 22일)

각종 역사 기록은 연산군 시대 갑자사화가 임사홍의 개인 원한에서 비롯된 사건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훈구파와 사림파를 막론하고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비판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연산군의 정치적 의도가 컸고, 임사홍은 그 하수인으로 충실했던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 독재는 극에 달했고, 신하들은 모욕에 가까운 처사를 당했다.

연산군과 임사홍의 조합은 독재 군주와 이에 영합한 참모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반면교사로 제시한다. 갑자사화 이후 임사홍은 병조판서 자리에 오르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지만, 이것은 결국 한때의 영화였고 영원한 간신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말았다.


연산군과 임사홍의 밀월 관계는 왕이 신하의 집을 찾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적혀 있는 시를 보게 됐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는가. 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가 쓴 이 시는 진시황에 빗대 연산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임사홍의 아킬레스건은 연산군에게 비판적인 아들 임희재였다. 자신과 함께 연산군 측근이 된 셋째 임숭재와 너무나 달랐다. 임희재는 사림파 김종직의 제자로서 이 병풍 사건 때문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다가 결국 갑자사화로 처형됐다. ‘해동야언’을 보면 두 부자 간 깊은 갈등이 잘 나타난다. 임사홍에게 있어서 권력은 아들 목숨보다 귀중했다.


임사홍과 연산군의 밀월 관계는 채홍사(採紅使)의 임명으로 이어졌다.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일을 담당하게 된 것. 임사홍은 임숭재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기생을 뽑아 올렸고, 이들을 운평, 흥청이라 칭했다.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던 연산군의 독재정치는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종말을 맞았고, 임사홍은 반정군 손에 의해 처형됐다. 그의 최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 부관참시당했다. 연산군 시대 그가 행했던 일을 그대로 돌려받은 셈이다.


성종 시대 한때 능력 있는 관리로 평가받기도 했던 임사홍. 유배 시절을 겪으면서 그는 권력에서 소외된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연산군 폭정을 부추기는 참모가 돼 왕의 총애를 받고 최고의 권력을 얻었지만, 연산군 몰락과 함께 그에게는 ‘간신’이란 악명만 남게 됐다. 그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대부분 대간(大奸·매우 간사), 대탐(大貪·매우 탐학), 대폭(大暴·매우 포악), 대사(大詐·큰 사기꾼) 등이었다. 세조나 성종이 하늘에서도 그를 견책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곁들여졌다.

“권력은 잠깐이지만, 간신이라는 낙인은 영원히 역사의 불명예로 남는다”는 사실은 임사홍을 통해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11호 (2017.06.07~06.13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