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1501년 7월 10일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대단찮은 벼슬을 살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 등지를 옮겨 다니며 청년기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지만 뽑힌 적은 없다. 유학(성리학)뿐 아니라 당시로선 잡학으로 통하던 천문 지리 수학 진법 등 다양한 학문에 심취했고, 벗들과 어울려 다니며 노장 사상도 깊이 탐구했다는 걸 보면, 그가 애당초 벼슬살이에 큰 뜻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두 차례 사화(기묘ㆍ을사사화)를 간접적으로 겪었는데, 10대 말 기묘사화(1519)땐 아버지가 벼슬을 잃고 얼마 뒤 숨졌다. 그런 저런 일이 정치와 관변 학자들에 대한 환멸을 키웠을지 모른다.
서른 즈음에 경남 김해로 낙향, 처가 도움으로 정자(산해정)를 짓고 학문하며 제자를 기르기 시작했고, 그 삶을 말년까지 고향인 합천(옛 삼가현)과 지리산 자락의 산청 덕산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고집스레 지속했다.
그는 당대의 유학자 퇴계 이황보다 한 해 먼저 났다. 안동의 근사한 가문에서 난 이황은 성균관을 거쳐 30대 초 과거급제하며 벼슬을 살았고, 그 역시 을사사화의 유탄을 맞긴 했지만 이후로도 형조ㆍ병조 참의를 지냈다. 그가 서당을 짓고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에 매진한 것은 50대 중반부터였다.
경상 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말이 돈 건 그들이 30대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명종과 선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저런 자리를 비워놓고 남명의 출사를 권했지만 그는 매번 사양했고, 맡더라도 아주 잠깐 맡고 만다. ‘남명 문집’ 등에 실린 그의 글 중에는 조정의 제의를 고사하는 상소문이 적지 않다. 50대 중반 단성 현감을 사직하며 선조에게 보낸 글(을묘사직소)은 “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망해버렸습니다.(…) 천 가지 백 가지 천재(天災),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고 수습하시렵니까”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그는 벌 받지 않았다.
그와 이황은 한때는 서로를 존중했으나 기질적으로 사뭇 달랐다. 이황은 조식을 두고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고, 조식은 이황 등을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천리를 담론하고 허명을 훔친다”고 비꼬았다고 한다. 퇴계학파는 남인, 남명학파는 북인으로 분화했고, 북인의 실사구시적 학풍은 후기의 실학으로 맥을 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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