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곤의 자는 사화(士華)며, 호는 지정(止亭)이요, 본관은 의령이다. 1489년(성종 20년)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남곤이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한 것은 연산군 시대였다. 1496년(연산군 2년) 홍문관 수찬에 임명됐으며 이어 사간원 정언(正言·사간원에 속한 정6품 관직)을 지냈다. 실무에도 상당히 능한 관료였는데, 특히 문장 능력을 인정받았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남곤은 서변(西邊)으로 유배됐으나, 1506년 중종반정이 발생하면서 연산군 시대의 유배는 오히려 훈장이 됐다. 중종 2년에 김공저·박경·조광보 등이 주도한 최초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막는 데 큰 공을 세우면서 남곤은 중종의 측근으로 자리를 잡았다.
1509년에는 황해도 관찰사에 올랐으며, 1511년 4월에는 대사헌이 됐다. “학문이 심오하고 문장도 연원이 있어 사장(師長·스승)에 매우 합당하다”거나, “문한(文翰)이 조선 제일”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 문장에 관한 한 최고의 인물이었다. 중종 대 정국공신이 아니면서도 남곤은 뛰어난 문장력과 정치적 감각으로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미래 정승 후보로 떠올랐다.
이런 남곤의 순탄한 행보에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 등장했으니 바로 조광조다. 중종 10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 올린 구언 상소문은 정국의 이슈가 됐다. 중종의 첫 왕비(단경왕후)로 반정 후 7일 만에 폐위된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각각 남평과 보은으로 유배됐다. 그런데 조광조가 정언이 되면서 구언 상소를 문제 삼은 것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했다. 특히 박상과 김정의 유배를 묵과하면 자신이 사직을 하겠다고 청했다. 이 발언은 정치 신인 조광조의 이름 석 자를 알리는 데 큰 계기가 됐다.
우참찬으로 있던 남곤은 조광조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박상과 김정의 처벌에 반대했다. 이처럼 남곤은 조광조가 정계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광조가 중종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으면서 신진 세력의 리더로 급부상하자 적대적인 관계가 됐다. 특히 경학(經學)을 중시하는 사림파의 중심 조광조와 사장(詞章·시나 문장을 중시하는 유학)을 중시하는 남곤은 이념적으로도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1517년 남곤이 동지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는 사대(事大)할 뿐 아니라 교린(交隣)하는 데 있어서도 사화(詞華·사장)가 중요하니, 장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광조가 정국의 중심에 자리 잡으면서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다양한 개혁 정책이 진행됐다.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했다. 특히 정국공신 위훈삭제 사건은 기득권 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남곤은 이런 국면을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친구인 심정을 끌어들이고 중종 즉위에 공을 세운 홍경주를 포섭했다. 이들은 중종과 잦은 면담을 통해 조광조의 전횡을 알렸으며 ‘주초위왕(走肖爲王)’과 같은 글을 유포시켰다. ‘선조실록’에는 남곤이 조광조에 대해 반감을 갖고, ‘주초위왕’의 정치 공작을 주도한 인물임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했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놔 갉아 먹게 했는데 마치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이 만들었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 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 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해 화를 조성했다.”
실록뿐 아니라 ‘연려실기술’ 등 거의 모든 기록에는 남곤이 기묘사화의 주모자임을 적시하고 있다. “중종이 조광조와 같은 선비들을 싫어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꾀를 내어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는 기록에서는 조광조 제거라는 중종의 의중을 파악한 남곤이 결국 해결사로 나선 정황을 보여준다.
사화의 주모자 남곤은 1년여 동안 밤이면 미복 차림으로 은밀히 남의 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자다가 새벽이면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만큼 조광조 제거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남곤은 자신이 중종을 위해 조광조를 제거한 것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후대의 평가는 한결같이 남곤을 ‘간신’으로 본다. 특히 남곤은 ‘유자광전’을 저술하면서, 간신의 전형 유자광의 죄악을 극진하게 드러냈는데, 정작 자신은 ‘제2의 유자광’이 됐다. 역설적이다. 당시 조광조를 후원했던 영의정 정광필은 남곤에 대해 “어찌 유자광과 같은 일을 하려 하는가”라고 독설을 퍼부었으며, “기묘년에 이르러 유자광의 일을 본받아 밤에 북문을 열고 당대의 청류(淸流)들을 한 그물로 다 잡았다. 남곤의 소행을 본다면 유자광의 무오년 때보다도 심한 점이 있으니, 이는 남곤이 이 전기를 지을 적에 스스로 자기의 악함을 서술해 소인의 본모습을 후일에 폭로한 것이다. 누구나 한번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팔뚝을 걷을 것이다”라고 한 기록도 보인다.
남곤이 기묘사화의 주동자였음에도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날 남곤을 불러 정사를 하라고 명했으나, 병을 핑계 대고 들어오지 않아 명을 보류했다. 당시에 화를 꾸민 것은 남곤이 스스로 물러나 두 번이나 불러도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 꾀가 교묘하나 일을 주동한 간계를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당적보(黨籍譜)’의 기록이다.
어찌 됐건 남곤은 기묘사화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됐다. 문장에 능해 정승감이 되리라는 예상은 맞았지만, 문장력으로 얻은 정승이 아닌 정치 공작으로 얻은 지위였다. 남곤과 함께 요직에 올랐던 인물은 심정, 이행, 이항 등이다.
중종 22년 남곤이 사망하자 중종은 깊은 애도를 표시하며, 조참(朝參)·경연(經筵)·열무(閱武) 등의 일을 정지하고, 소찬(素饌·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반찬)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중종을 도와 역모를 차단하고 그 공으로 최고의 지위에 올랐지만 역사는 남곤을 ‘간신’으로 규정하면서, 그와 같은 인물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야 됨을 경계하고 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남곤이 젊어서는 글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출세에 급해 역모를 조장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남곤도 자신이 행한 죄를 이미 파악하고 있던 정황도 나타난다. 남곤은 옥사를 주도한 후에 친척과 후배들에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다. “응당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는 답을 듣고는 하인을 시켜 평생 쓴 초고를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중종 시대 제일의 문장가였지만 그의 작품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이유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남곤이 이미 사림을 해친 뒤, 스스로 죄를 받을 줄을 알고, 자기 문장이 세상에 나오면 거듭 사람들의 치욕을 받으리라 여겨 죽을 때 자기의 원고를 모두 내다가 불살라 없앴으니, 죽은 뒤의 계획도 또한 간교하다 하겠다.”
최소한의 명예라도 지키기 위해서일까? 죽기 직전 남곤은 자제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殮襲)하지 말 것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남곤은 죽은 뒤 사림파가 다시 권력을 잡고 조광조가 신원 복권되는 과정에서 관작을 모두 추탈당했다.
“문장이 대단하고 필법(筆法) 또한 아름다웠다. 평생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재주가 뛰어나서 지론(持論)이 올바른 것 같았다.”
실록의 평가처럼 남곤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지만, 그런 장점은 모두 사라진 채 역사는 그를 간신의 전형으로 기억한다. 권력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원고까지 잃어버린 남곤의 사례는 현 정치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15·창간호 (2017.07.05~07.11일자) 기사입니다]
'人文,社會科學 > 歷史·文化遺産'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한니발 장군은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을까? (0) | 2017.07.18 |
---|---|
[양상훈 칼럼] 작전명 에버-레디(Ever-ready)를 아십니까 (0) | 2017.07.13 |
[기억할 오늘] 조식(7월 10일) (0) | 2017.07.10 |
실록에선 ‘죄인’ 혹평, 불교에선 ‘보살’ 찬사···어느 해석이 맞을까 (0) | 2017.07.09 |
낙랑군 소재 평양 아니라는 유사역사학이 왜 문제일까 (0) | 2017.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