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 [5]

바람아님 2017. 8. 4. 15:59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 선화공주 로맨스 뒤흔든 미륵사지 사리봉영기


(조선일보 2017.07.26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현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얼마 전 석탑 중앙의 심주(心柱)에 대한 레이저 

물리 탐사 중 발견된 동공(洞空)의 흔적이 사리공(舍利孔)인지 확인할 참이었다.


현장 책임을 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조바심이 났다. 

석탑 해체 작업을 시작한 지 7년 3개월이 지났지만 속도는 더뎠고 큰 성과는 없었다. 

1층은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활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전면 해체라는 원안을 고수한 그였기에 부담은 더욱 컸다.


금제사리봉영기(앞면), 가로 15.3㎝,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금제사리봉영기(앞면), 가로 15.3㎝,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오후 3시. 준비를 마치고 육중한 심주 윗돌을 들어 올리자 번쩍 빛이 났다. 

아랫돌 한가운데에 네모난 사리공이 숨겨져 있었고 그 속에서 금빛 찬란한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어떤 연유로 불사리를 모셨는지 기록한 봉영기

(奉迎記)였다. 빼곡히 새겨진 글귀 가운데 '우리 백제의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금판을 수습해 뒷면을 보니 '대왕폐하'라는 네 글자가 선명했다. 

대왕은 백제 무왕이었다. 639년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봉영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이 석탑을 만들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서동과 결혼한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왕비가 되어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문을 갖게 됐다.


발굴은 쉽지 않았다. 사리공이 가로세로 각 25㎝, 깊이 26.5㎝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고 그 속에 크고 작은 유물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물을 수습하고 발굴을끝낸 것은 30시간이 지난 이튿날 저녁 9시. 

출토된 유물은 무려 72건 9947점에 달했다.


석탑 1층을 그대로 두고 복원하자는 의견을 따랐다면 사리공 속 유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공간 속 타임캡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발굴을 통해 우리는 미륵사지 석탑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지만 '세기의 로맨스' 

여주인공, 선화공주를 잃고 말았다.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5] 황남대총 신라 왕비, '못 말리는' 명품족?


(조선일보 2017.08.04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황남대총 북분(北墳)에서 출토된 터키석 장식 금팔찌(보물 623호). 지름 7.2㎝.황남대총 북분(北墳)에서 출토된 터키석 장식 금팔찌(보물 623호). 

지름 7.2㎝. /국립경주박물관


1973년 7월 7일. 경주 98호 고분, 즉 황남대총 앞에 제사상이 차려졌다. 

묘주(墓主)에 대한 위령제이자 벼르고 벼르던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발굴 지시는 2년 전에 받았지만, 길이가 무려 120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무덤을 

발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이 시험 삼아 발굴한 155호 고분(천마총)에서 

금관과 천마도 등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단에서는 "이미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황남대총을 팔 필요가 있겠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높은 곳' 지시로 

시작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진행하기로 했다. 

남북으로 연접된 두 무덤 중 어느 쪽이 왕릉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북쪽 무덤부터 파기로 결정했다.


1974년 10월 28일. 조사원들의 손길이 마침내 목관 내부로 접근했다. 

목관 범위 전체에 뒤덮인 검은 흙 사이사이로 비쳐 나오는 황금빛 광채! 조사단은 왕릉임을 직감했다. 흙을 제거하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금관, 금과 유리를 섞어 만든 목걸이, 금팔찌와 금반지, 금허리띠가 가지런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종류나 수량 모두 천마총 등 여타 신라 고분을 압도했다. 이튿날 주요 일간지에 관련 내용이 보도되면서 이 무덤 주인공은 

5세기대 신라왕으로 확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발굴이 끝나갈 무렵 새롭게 노출된 은제 허리띠 장식에서 '부인대(夫人帶)'란 

글자가 확인되면서 무덤 주인공의 지위는 왕비로 바뀌게 됐다.


발굴이 끝난 후 이 무덤 속 유물 가운데 '물 건너온' 명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구려산 금귀걸이, 서역산 보석 장식 금팔찌, 중국 남조(南朝)에서 들여온 청동다리미와 도자기, 동로마와 페르시아산 

유리그릇 등이 그것이다. 황남대총은 한 번 무덤을 쓴 다음 다시 사람이나 물품을 추가로 묻을 수 없는 구조이다. 

따라서 무덤 속 유물들은 왕비의 장례식 때 함께 묻힌 것이다.


이처럼 세계 각지의 여러 공방에서 정성스레 만든 명품들이 한 공간에 묻힌 것은 발굴 역사에서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통상 그 이유를 둘러싸고 '글로벌 신라'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혹시 무덤 속 신라 왕비가 '못 말리는' 명품족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