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8.09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90년 6월 12일. 수로왕릉에 인접한 김해 대성동의 야트막한 언덕에서 발굴이 시작됐다.
금관가야 왕릉을 찾기 위해 경성대 박물관이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금관가야 500년 왕도에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을 제외한 그 어떤 왕릉급 무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미스터리였다.
표토를 걷어내자 길이 10여m 무덤 구덩이 흔적이 드러났고 조심스레 내부를 노출한 결과 '철의 왕국' 가야의 무덤답게 쇠를
두드려 만든 갑옷, 말갖춤, 덩이쇠(鐵鋌) 등 수백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금관가야 왕릉의 소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김해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된 동복(銅鍑·청동솥).
높이 18.2㎝. /국립김해박물관
1991년 3월. 한 달 전 이미 '29호분'이라는 거대한 무덤의
윤곽은 확인했지만 그 위에 중복된 5기의 무덤을 차례로
조사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그제야 내부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해련 연구원은 수십 점의 토기와 철기가 가지런한
열을 이루며 출토되는 점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격식이
느껴졌고 이전에 발굴한 유물들보다 한 세기 이상 오래된
점에 주목했다. 옆자리의 동료에게 "혹시 이 무덤이 금관가야
최초의 왕릉은 아닐까?"라고 속삭였다.
기대는 곧 현실이 됐다.
이 연구원의 손길이 무덤 중앙부에 다다르자 그곳에서
두 귀를 쫑긋 세운 모양의 청동솥과 함께 권위를 상징하는
흑칠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유목민들이 유제품을
끓이거나 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한다는 청동솥,
즉 동복(銅鍑)의 발견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무덤은 현재 금관가야 최초의 왕릉으로 비정되고 있다.
대성동 고분군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만 해도 금관가야의
왕족 묘역을 찾았다는 점, 묘제와 유물의 격으로 보아 김해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했으나
동복 출토 이후에는 금관가야 왕족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동복이 공개되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기마민족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역설했고, 발굴 책임자인 신경철 교수는 금관가야의 왕족이 부여에서 이동해왔다고 주장했다.
그토록 찾으려던 금관가야 왕릉은 '신화의 땅'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음이 밝혀졌지만, 왕릉 발굴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야 초기의 역사를 더 깊은 미궁으로 빠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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