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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수로 따지면 영국 함대의 피해가 더 컸다. 사망 20명에 부상 43명. 특히 2,371t급 기함 ‘유리아나스’함이 피폭 당해 함장과 부함장이 즉각 전사하고 함대 사령관도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기함뿐 아니라 중형함 2척도 대파되는 손실을 입었다. 영국 해군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전투에서, 더욱이 비유럽 군대와 포격전에서 이 같은 피해를 입은 것은 처음이다. 영국 함대는 결국 17일 탄약과 석탄이 떨어져 임시 모항으로 정한 요코스카로 돌아갔다. 사쓰마와 영국은 서로 승리를 주장하면서도 속으로 놀랐다.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해 반강제로 개항된 1853년 이래 사쓰마는 외세 배격론의 대표 주자였으나 사쓰에이 전쟁을 겪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문호를 개방한 막부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하며 내걸었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 중에서 ‘존왕’만 남고 ‘양이’는 사라졌다. 영국 함대의 위력을 절감한 사쓰마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 배우기에 나섰다. 1865년 해외 진출을 금지한 막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청년 19명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어느 지역보다 빨리 신문물을 익혔다. 사쓰마가 일본의 무수히 많은 지방 가운데 메이지 유신 초기 유달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영국 함대의 피해가 예상보다 컸던 이유는 함교에 막부가 보낸 배상금을 쌓아두고 탄약을 갑판에 쌓아놓는 등 사쓰마를 얕잡아 봤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이 ‘전쟁’으로 부르는 이 전투를 ‘가고시마 포격(Bombardment of Kagoshima)’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도 ‘사실상의 패전’이라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대놓고 영국의 패전을 부각시켰다. 중요한 점은 영국이 제휴선을 막부 중심에서 웅번(雄藩·힘이 강한 지방정권)으로 분산시키기 시작했다는 점. 막부의 친 프랑스 노선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영국의 이런 정책은 결국 왕정복고를 앞당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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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쓰마와 조슈는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 즉 토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의 패권을 놓고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1600) 이후에 도쿠가와 막부 휘하로 들어와 늘 감시와 차별을 받던 ‘찬밥’ 신세였다. 수도인 에도(江戶·도쿄)에서 멀리 떨어져 2세기 이상 절치부심하며 경제력을 기른 결과가 메이지 유신에 응축돼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사쓰마와 조슈 등이 주도한 개혁은 내부와 외부에서 숱한 위기를 맞았다. 보신전쟁(戊辰戰爭·1868~1869)과 세이난전쟁(西南戰爭·1877)은 물론 고비 때마다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다.
고 에드윈 라이샤워 하바드대학 교수(일본사)는 ‘일본 제국주의 흥망사’에서 근대 일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젊은이들의 꿈이라고 봤다. 하급 무사 출신이 대부분인 젊은 사무라이 그룹의 거대한 꿈에 허울만 남아 있던 국왕이 합류하며 일본이라는 근대 국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사쓰에이 전쟁 역시 젊음이 익어갔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고향인 사쓰마보다 일본 국가를 먼저 생각했던 정치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러일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승리를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郎) 등이 당시 전쟁에서 해안포대 병사로 참전해 죽다 살아난 인물들이다.
사쓰마는 한국과 악연으로 얽혀 있다. 지역 언어가 한국어와 유사성이 많을 만큼 영향을 받은 한반도에는 해악을 끼쳐왔다. 임진왜란에서 용명을 떨쳤다는 시마즈 가문의 장수들부터 가고시마의 카미카제 자살 특공대 기지를 건설했으나 종전 후 행방이 묘연한 조선인 징용자까지, 옛 사쓰마번 지역에는 한국인의 한이 서려 있다. 사쓰마번이 경제력을 갖추는데도 조선인 도공들의 힘이 컸다. 오죽하면 도고 헤이하치로가 조선인 도공의 후손이라는 설까지 돌까. 사쓰마와 얽힌 애증이 풀렸으면 좋겠다. 오랜 세월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최상류층 자제가 아니어도 희망을 위해 매진하는 모습만큼은 정녕 부럽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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