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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13) 준비된 왕 인종의 참모, 김인후 호남 사림 자존심이자 仁宗의 학문적 스승

바람아님 2017. 8. 22. 15:26
매경이코노미 2017.07.24. 09:26
조선의 왕 중 가장 짧은 기간 왕으로 보낸 이는 고작 8개월 재위한 조선의 12대 왕 인종(1515~1545년)이다.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인종은 사실 준비된 왕이었다. 1515년 2월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1520년 6세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25년간 왕세자로 있다가 1544년 중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세자로 있던 시절 사림파를 적극 중용했다. 그중 핵심은 인종의 스승으로 활약한 김인후(金麟厚, 1510∼1560년)였다.


16세기는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신진 세력인 사림파가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비록 훈구파와 정치적 대결에서 패배하면서 몇 차례 사화를 당했지만, 사림파의 성장은 시대적 흐름이었다. 사림파는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됐지만 호남 지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김인후가 대표적이다.


그는 장성에서 성장해 호남 지역에 성리학을 전파한 학자였다.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본관은 울산으로 참봉 김령과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5, 6세 때에 문자를 이해해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술과 시를 좋아했고, 마음이 관대해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다”고 평했다.


이 시기 김인후의 스승은 중종 후반기를 대표하는 사림파 학자 김안국, 최산두 등이었다. 김인후의 연보에는 1519년(중종 14년)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다는 것과, 1527년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음이 기록돼 있다.

‘시경’을 탐독하고 성리학에 전념하던 김인후는 22세던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이황과 함께 공부했는데, 이황은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다”라고 할 만큼 김인후에게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1540년 31세로 별시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1541년에는 독서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줘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지냈으며, 이후 홍문관 저작, 시강원 설서, 홍문관 부수찬 등을 지냈다.


김인후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 1519년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조광조 등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인종대 이후에는 주로 고향인 장성에 은거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조광조 등 기묘사림의 학맥을 이으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영남에 이황이 있다면 호남에 김인후가 있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기대승과 정철 등 호남 출신 학자가 그의 제자임을 자처한 것에서도 김인후가 16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김인후가 관직에 진출해 인연을 맺은 대표적인 인물은 다름 아닌 인종이다. 인종이 세자로 있던 1543년 4월 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의 설서가 된 김인후는 한 달에 10일을 궁궐에 머물면서 인종의 학습을 도와줬다. 시강원의 여러 스승 가운데서도 인종이 김인후를 특히 믿고 따랐다.


하지만 인종과 김인후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543년 12월 김인후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을 자청해 지방으로 내려갔고, 인종은 다음 해 11월 즉위했다가 1545년 7월 승하했기 때문이다. 정작 왕이 된 인종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할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김인후는 인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탕약을 만들기 위해 약방에 참여하려 했지만 결국 인종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인종은 왕으로 있던 시절, 성리학 숭상과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파들의 명예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조광조, 김정, 기준 등의 복직이 이뤄진 데는 인종의 역할이 컸다. 1543년 6월 김인후가 기묘년에 희생된 사림파들의 신원을 요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인후와 인종의 생각이 일치했음을 볼 수가 있다.

8개월 만의 짧은 재위 기간을 마지막으로 인종이 승하한 후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을사사화가 발생하는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김인후는 이후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다시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인종 승하 이후 왕위는 이복동생인 명종이 계승했고, 12세의 어린 명종을 대신해 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외척정치의 폐단은 심해졌다. 인종이 그렇게 희구했던 성리학 중심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김인후는 명종대에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성균관 전적, 공조정랑, 홍문관 교리, 성균관 직강 등에 제수됐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성리학에 전념하면서 호남 지역에 성리학이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간혹 관직에 나아갔을 때는 기묘사림이 주장한 소학과 향약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장했다.


1548년에는 처향(妻鄕)인 순창의 점암촌으로 옮겨 초당을 세우고 훈몽재(訓蒙齋)라 이름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1549년 10월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하자, 고향인 장성에서 여묘살이를 하며 예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인후는 짧은 관직 생활 동안 인종에게 큰 영향을 줬고, 남은 대부분 생애는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호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활약해 정철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사림파 학자로서 김인후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끌어올린 인물은 다름 아닌 정조다. 정조는 김인후를 성균관 문묘에 배향하도록 했다. 이는 조선시대 학자에게 최고의 영예였다. 1796년(정조 20년) 김인후의 문묘 배향은 그만큼 김인후의 학자적 위상이 높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소외된 지역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영남과 마찬가지로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하지 못했던 호남 지역을 끌어안으려는 시도를 했다. 정조가 호남 끌어안기 상징으로 지목한 인물은 바로 김인후였다. 정조가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면서 내린 교서는 실록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경은 해동의 염계(濂溪)이자 호남의 공자이다. 성명(性命)과 음양에 관한 깊은 식견은 아득히 태극도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 이치를 연구하고 근원을 탐색하여 일찍이 ‘역상편(易象篇)’을 저술하였는데 여러 학설이 탁월했다. (중략) 여러 사람들의 논의 또한 모두 일치돼 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에 경을 문묘의 곁채에 종사하는 바이니, 이단을 물리치고 편파를 배척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키는 때에 속하며, 문묘에 종사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는 것은 실로 선비들의 기풍을 격려하는 기회이다.”


사실 조선 중기 이후 영남 지역 학통이 강조되면서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이 문묘에 종사되고, 서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기호학파의 중심인 이이와 성혼이 문묘에 종사되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호남 사림의 문묘 종사는 이전까지 없었다.

정조실록에는 인종과 김인후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왕과 신하로서 뜻이 이미 합치돼 동궁에 있을 때부터 신임을 받았고, 은연중에 기약이 이루어져 뜻을 담은 묵화를 직접 하사했다. 다행히도 왕의 교화를 보필하는 적임자가 있어 크게 빛나는 아름다운 정사를 당시에 보게 되리라고 기대했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마침내 지방에서 영영 세상을 떠나고 말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7월 깊은 산중에서 창오(蒼梧)의 원통한 눈물을 부렸다.” (정조실록, 1795년(정조 20년) 11월 8일)


김인후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서 조광조 등 선배 학자들의 성리학 이념이 본격적으로 구현되는 조선 사회를 희구했다. 학문적 능력은 탁월했으나 인종의 급서로 인해 현실 정치에서 이를 적극 구현할 수 없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호남 지역에 성리학이 자리를 잡아나가도록 했던, 16세기 호남 사림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현재 장성에는 김인후를 배향한 필암(筆巖)서원이 있는데, 이곳은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이곳에는 그의 사위로서 학맥을 이은 양자징도 함께 배향돼 있다.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 당시에도 필암서원은 그 무게와 중요성 때문인지 문 닫지 않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인종이 직접 내린 ‘어필묵죽도(御筆墨竹圖)’가 경장각에 보관돼 있어 인종과 김인후의 각별한 관계를 접할 수가 있다.


인종이 좀 더 오래 재위해 김인후와 함께 조선 왕조를 이끌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17호 (2017.07.19~07.25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