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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2> 을미왜변과 대한제국
명성황후 발인 반차도. 1895년 10월 8일 을미왜변이 일어난 지 2년2개월 후인 1897년 11월 22일의 명성황후 장례식 장면이다. 상여를 메고 장지로 향하는 행렬을 묘사했다.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에 실려 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첫 회(‘식민지 프레임, 이제는 벗자’, 8월 13일자) 기사가 나간 후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한마디로 놀라운 내용이라면서 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궁금해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독자들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순 없을 것이다. 독자들이 알아보려고 해도 ‘식민지 프레임’을 벗어난 책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의 역사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식민지 프레임에 더 말려들어가는 악순환의 구조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용어인 소위 ‘갑오경장’(1894)-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을 그대로 물려받아 쓰고 있는 학자들의 직무유기를 탓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1897. 10. 12~1910. 8. 29)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돌아보는 일은 식민지 프레임을 벗어나는 출발점이다. 1894년(갑오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전개된 조선의 상황을 소위 ‘갑오경장’이란 이름으로 미화해 왜곡해선 안 되며, 조선인 2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갑오왜란’의 관점으로 다시 보아야 대한제국의 수수께끼가 풀린다는 점을 지난 첫 회 기사에서 서술했다. 이제 그 갑오왜란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을미왜변’(1895)의 실상을 돌아보자. 을미왜변 이후 조선 백성들의 거국적 분노에 힘입어 이뤄진 사건이 ‘아관망명’(1896)이고 그 결실이 대한제국이기 때문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왕비가 자신의 왕궁에서 ‘소시(壯士)’라는 일본 낭인들을 들러리로 동원한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고 불태워졌다. 세계가 놀란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우리는 그동안 ‘을미사변’이란 중립적 용어로 얼버무려 왔다. 명성황후를 실제 누가 칼로 찔렀는지 그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것도 알고 보면 최근의 일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0년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을 펴내며 대한제국 다시 보기의 물꼬를 텄다. 곧이어 2001년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효형출판)를 통해 대한제국과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펼쳐 보이며 을미왜변이 일제의 만행이었음을 확인시켰다. 2009년에는 재일동포 2세 역사학자 김문자(金文子)씨가 펴낸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태학사·2011년 번역)에서 일본 군부 자료 분석을 통해 을미왜변이 일왕 직속의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범죄임을 밝혀냈다. ‘소시’라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추정됐던 그동안의 통설을 뒤집은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성황후에게 칼을 댄 자가 누구인지까지 밝혀졌는데 그것은 강범석 히로시마(廣島)시립대학 명예교수의 『왕후모살』(솔·2010), 이종각 동양대 교수가 펴낸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메디치미디어·2015) 두 책을 통해서다. 왕후 시해라는 중차대한 일을 깡패 같은 낭인이 저질렀다는 점에 강범석은 의문을 제기하며 연구를 시작했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다뤄진 을미왜변 관련 비밀 전문 등을 분석하며 경성수비대(후비보병 독립 제18대대) 대장 직속의 육군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여기에 더해 이종각은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의 보고서를 분석해 을미왜변이 일본 군부의 군사작전으로 진행됐으며 범인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음을 다시 입증했다.
1909년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2007년 복원된 경복궁 건청궁. 명성황후가 살해된 장소다. 범행을 일본 낭인들이 저지른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 명성황후를 칼로 찌른 자는 일본 육군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음이 최근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일본 군부의 군사작전으로 진행됐다. [중앙포토]
범인이 미야모토 소위냐 낭인패냐는 것은 일본 정부의 책임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낭인일 경우에는 정부의 책임이 도의적인 것으로 약화된다. 일본 육군 소위라면 다르다. “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을 저지른 것”(우치다 주한영사 보고서의 표현) 또는 “전 세계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범죄”(베베르 러시아 공사가 1895년 10월 9일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는 일본군이 군사작전을 통해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가 된다. 게다가 국제법상 정치범죄로 인정되지 않는 국가원수 가족 시해 범죄가 중첩된다. 전쟁범죄는 시효 없이 소급 가능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일본 정부도 법적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황태연 지음,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502~503쪽 참조). 우치다 영사는 왕비 시해 당일 오후 곧바로 하라 다카시 일본 외무차관에게 사건개요를 적은 극비 사신을 보내며 읽고 나서 불태울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하라는 이 사신을 자신의 생가 창고에 갖다 두었고 이것이 90년 뒤 다른 문서들과 함께 발견돼 1984년 『하라 다카시 관계 문서』로 묶여 나와 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극비 사신 속에 우치다는 “(왕비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라고 적어 놓았다.
히로시마 재판에 공식 회부된 이들은 미야모토의 들러리로 경복궁에 침입한 50여 명의 낭인과 군인들뿐이었다. 미야모토 소위는 교묘하게 빼돌려졌다. 미야모토는 범행 이후 버젓이 경성수비대에 근무하다가 11월 18일 별도로 군용선 오와리마루로 귀국하는데, 육군대신·참모총장·육군차관·참모차장 등 왜군 대본영 수뇌부 전체가 일개 소위의 소재를 파악해 별도 귀국 조치를 내리는 등 비상한 관심을 갖고 움직였음이 일련의 전보로 드러났다(이종각 지음,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146~152쪽 참조). 미야모토를 철저히 은닉해 오던 일본 정부는 1년 9개월 뒤인 1897년 9월 27일 그의 병과를 헌병 소위로 바꿔 대만에 파견했다. 토착민의 항쟁을 진압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그는 대만에 투입된 지 2개월23일 만에(그해 12월 20일) 전사했다. 미야모토 소위가 49세로 전사한 사실은 군적에 기록돼 있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246만6000명의 전사자 명부에는 누락돼 있다. 일본 군부와 정부가 미야모토의 입을 염려해 위험지대로 파견했고 또 전사 후에도 이웃 나라의 왕비 시해자임이 밝혀져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미리 계산한 교묘한 은폐로 보인다. 왕비 살해 후 미우라 공사가 국왕을 알현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에 들어와 범행 현장을 둘러보았고 시신 소각 명령도 내렸다(한영우 지음,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57~61쪽 참조). 미우라는 범행 6일 뒤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접 보낸 공식 보고서(10월 14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렇게 하게 된 바, 그 전후 사정을 잘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요컨대 이번 사건은 당국(當國:조선) 20년 이래의 화근을 단절하여 정부의 기초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단초를 열 것이라고 본관은 확신하는 바, 비록 그 행동이 좀 과격한 바 있었다고 해도 외교상의 곤란만을 극복한다면 우리의 대한(對韓) 정략은 이로써 확립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市川正明 편, 『日韓外交史料(5)』, 89쪽) 1910년 무렵의 장충단공원. 을미왜변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막으려다 전사한 연대장 홍계훈과 궁 내부대신 이경직 등 충신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00년에 조성됐다. 대한제국의 추모공간이었던 장충단공원은 강제병합 이후 일제에 의해 위락공원으로 변질된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博文寺·박문사)를 세우기도 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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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이토 사살 후 “황후 살해한 죄”
조선을 정복하려는 당초의 목적을 위해 지난 20년 동안 화근이었던 왕비를 제거했다는 얘기가 미우라 보고서의 골자다. 이를 통해서도 을미왜변이 갑오왜란의 연장선상에서 자행된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전쟁범죄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총리가 이토 히로부미였다는 점도 놓쳐선 안 된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후 공개적으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 가운데 제1의 항목이 “황후를 살해한 죄”였다. 요즘도 우리 사회에 ‘황후는 무슨 황후냐’면서 명성황후의 존재 자체를 폄하하는 경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같은 시각으로 본다면 안중근 의사가 왜 이토를 사살한 첫째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 문제를 거론했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토가 지휘하는 일본 정부와 김홍집 중심의 친일내각은 사활을 걸고 을미왜변의 은폐에 나섰다. 미우라와 대원군이 공모했으며, 왕비와 대원군 간의 집안싸움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에 끌려나왔음은 친일파 윤치호가 쓴 『윤치호 일기』(1895년 10월 29일자)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김홍집 친일내각은 이 사건을 훈련대와 순검(巡檢·경찰)의 충돌로 변조하고 왕비가 무사한 것으로 꾸며 발표했다. 하지만 황제를 보호하는 시위대의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 등 외국인 목격자와 각국 공사들의 폭로로 사건을 은폐하고 호도하려는 친일내각의 시도는 무산됐다. 그러자 일본과 친일내각은 방향을 틀어 을미왜변이 일본 정부 모르게 미우라가 단독으로 대원군과 공모하여 낭인들을 동원해 저지른 사건으로 꾸며 댔다. 친일적 시각에서 사건들을 기술한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이 같은 일제의 연막과 홍보를 되뇌고 있다. 한성신보사 앞에 모인 낭인들. 1895년 2월 17일 창간된 ‘한성신보’는 일본 외무성의 기밀비와 매월 지급되는 일본공사관의 보조금으로 운영됐다. 한성신보사를 거점으로 아다치 겐조 사장 휘하에서 활동하는 낭인들이 명성황후 살해에 대거 들러리로 가담했다.
[사진 눈빛출판사]
왕비 시해 사건에는 다수의 일본인 신문기자들이 관여하는데 이들이 왕비를 비방하는 글을 쏟아냈다. 을미왜변을 합리화하고 그 책임을 대원군에게 돌렸다.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896년 『조선왕국』을 쓴 기쿠치 겐조가 대표적이다. 기쿠치가 강제병합 직전인 1910년 7월에 펴낸 『조선 최근 외교사 대원군전 부(附) 왕비의 일생』은 ‘역사 왜곡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기쿠치 겐조는 일본 도쿄 ‘고쿠민신문(國民新聞)’의 서울특파원으로 들어와 1895년 10월 8일의 왕비 시해 사건에 직접 가담했다. 이 책을 쓸 때 기쿠치는 일본 외무성과 공사관 기관지인 ‘한성신보(漢城新報)’ 주필 겸 ‘고쿠민신문’의 사장이었다. 그는 1945년 패전으로 돌아갈 때까지 무려 52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언론인이자 역사저술가로 활동하며 한국사를 식민사관으로 채색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조선잡기』(朝鮮雜記·전2권·1931), 『근대조선이면사』(1936), 『근대조선사』(전2권·1937·1939) 등도 펴냈다. (하지연 지음,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서해문집, 2015)
기쿠치는 대원군과 왕비의 극한적 갈등을 꾸며 내면서 대원군을 왕비 살해의 주범으로 몰아갔다. 대원군을 영웅으로 묘사하면서 왕비는 온갖 추잡한 일에 연루된 인물로 그려냈고, 고종은 대원군과 왕비의 틈바구니에서 무능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왕비 시해의 주범이 일본인이란 사실은 당시 국내외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음에도 이런 일을 꾸며 댔던 것이다. 그럼에도 기쿠치가 퍼트린 낭설들이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의 식자층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심지어 소설이나 만화 등 더 과장된 형태로 전승되며 역사 왜곡의 큰 흐름을 만들어 냈다.(이태진, ‘역사소설 속의 명성황후 이미지’, 『한국사 시민강좌』 제41집, 2007년 8월, 일조각) 일본 정부와 친일 김홍집 내각은 을미왜변에 왜군이 개입한 사실이 발각되고 나서도 ‘한성신보’를 앞세워 왕비가 궁을 빠져나간 것 같다며 왕비 시해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정보 조작 때문에 당시 독일공사관조차 왕비의 생존 사실을 본국에 타전하는 외교적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김홍집 친일내각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12월 1일에야 황후의 붕어 사실을 국민에게 알렸다. 경복궁이 초토화되고 왕비까지 살해되면서 고종이 안전하게 거처할 땅은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갑오왜란 이후 을미왜변을 거치며 조선은 사실상 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황후 살해에 복수심을 느끼는 백성들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미의병이라고 부른다. 이 을미의병은 대개 고종의 밀지를 받고 거의했다. 그리고 고종과 의병의 합작으로 아관망명이 준비되고 실행된다. 을미의병의 대부분은 동학농민군의 재봉기였다. 그런 점에서 갑오왜란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이런 가운데 황후의 장례는 곧바로 치러지지 못했다. 2년2개월 후인 1897년 11월 22일에야 장례가 치러질 수 있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한 달 만에 대한제국 선포의 의미를 대외적으로 과시한 행사가 바로 명성황후 장례식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 모르고 지내 왔다. 그 이유가 뭘까.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서울역사박물관, 눈빛. 더 읽어볼 만한 책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한영우·효형출판·2001),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영희·서울대출판부·2003),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한영우 외·푸른역사·2006), 『왕후모살』(강범석·솔·2010),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김문자 지음·김승일 옮김·태학사·2011),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이종각·메디치미디어·2015),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이상 황태연·청계·2017)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