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이이, 이준경, 정철, 윤두수, 이산해,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조선을 대표하는 참모형 학자들이 대거 배출된 시대가 선조 때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조에 대한 긍정적인 리더십도 엿볼 수 있다. 여러 참모 중 선조와 애증의 관계를 가졌던 대표적인 인물이 정철(1536∼1593년)이다.
정철은 부친 정유침과 죽산 안씨 사이에서 1536년(중종 31년) 태어났다. 지금 종로구 청운초 앞에는 정철의 탄생을 알리는 여러 표시가 있으며 그의 작품이 담벼락에 실려 있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정철은 맏누이가 인종의 후궁이 되고 막내 누이는 성종의 아들인 계림군(桂林君)에게 출가하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는다.
어린 시절 왕자들과 어울렸으며, 인종의 동생이자 세자였던 경원대군(후의 명종)과 친분을 맺었다. 그러나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발생하면서 계림군이 역모 혐의로 처형당하고 계림군의 장인인 부친과 처남인 맏형이 유배길에 올랐다. 1547년(명종 2년)에는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이 터지면서 부친이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됐다. 정철 또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했다.
1551년(명종 6년) 정철이 16세가 되던 해 부친이 7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정철의 가족은 전라도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정철은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호남 지역의 대학자 김인후와 기대승을 스승으로 삼는 기회를 얻었다. 정철은 김인후와 기대승에게서 학문뿐 아니라 문학적 영향도 크게 받았고, 이것은 훗날 정철이 조선을 대표하는 문학가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됐다. 정철은 그와 뜻이 맞는 사람들과도 두루 사귀었는데 훗날 서인의 학문적 원류가 되는 이이, 성혼과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다.
16세부터 약 10년간 수학 과정을 거친 정철은 1561년(명종 16년) 26세가 되던 해 과거에 응시해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 해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됐다. 유년 시절 궁중을 출입하며 쌓았던 명종과의 친분은 정철의 관료 생활을 순탄하게 했지만 위기도 있었다. 사헌부 지평 시절 정철은 명종의 사촌 형 경양군의 처남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왕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명종은 정철을 요직에서 배제했고, 한동안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567년 선조의 즉위는 정철의 정치 인생에 큰 돌파구가 됐다. 선조는 즉위 후 학문적 능력을 갖춘 사림 세력을 적극 등용했고, 이런 흐름 속에서 정철은 홍문관 수찬을 제수받았다. 1568년(선조 1년) 최고 요직 중 하나였던 이조좌랑에 임명됐으나, 1570년 부친상을 당한 후 1572년까지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시묘살이(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간 묘소 근처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는 일)를 했다. 1573년에는 모친상을 당해 다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1575년(선조 8년) 정철은 시묘살이를 끝내고 관직에 복귀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시기는 동인과 서인의 분당(分黨)에 따른 당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철은 서인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1578년(선조 11년) 대사간에 제수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수수 사건 처리 문제로 동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했다. 정철은 낙향 후에도 여러 관직에 제수됐지만 관직을 받지 않고 창평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년) 선조는 정철이 동인이 득세하고 있는 중앙의 관직에는 뜻이 없음을 알고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한다. 관동 8경을 유람하면서 느낀 감회를 노래한 ‘관동별곡’은 이 시절 탄생한 그의 대표 작품이다.
1581년 외직에서 돌아와 다시 내직을 맡았지만 다시 동인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만큼 동인 측에서는 정철을 서인의 강경 정치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정철은 다시 창평으로 돌아갔지만 정철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계속됐다. 같은 해 12월 정철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하면서 관직에 머물게 했다. 이후 정철은 1585년(선조 18년)까지 도승지, 함경도 관찰사, 예조판서, 대사헌 등의 직책을 지내면서 선조의 최측근 참모로 활약했다.
하지만 정치적 입장이 강하고 반대파에 대한 공격 성향이 강했기에, 동인들이 집권하면 정철은 늘 정치적 표적이 됐고, 창평으로 낙향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한편으로 낙향 시기는 정철로 하여금 정치적 긴장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시간을 갖게 만들어줬고, 그의 문학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과 같은 작품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 일이다.
1589년(선조 22년) 10월 ‘천하는 공물(公物)’이라고 주장한 정여립 역모 사건이 일어나 조정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정치적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정여립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들은 줄줄이 체포돼 처형을 당하는 ‘기축옥사’로 이어졌다. 기축옥사는 정치적으로 서인이 동인에 대해 정치적 반격을 가하는 사건으로 비화됐고, 동인 탄압의 주역으로 활약한 인물이 정철이었다. 처음 역모의 수사 책임자는 동인 정언신이 맡았으나, 정언신이 정여립과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낙마했다. 그리고 이해 11월 정철이 우의정에 제수되면서 위관(委官), 즉 수사 책임자가 됐다. 정철이 위관이 된 후 정여립과 왕래한 자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거세지면서 다수 대신들이 뚜렷한 근거 없이 심증만으로 무분별하게 죽임을 당했다. 동인들은 서인, 특히 옥사를 주도한 ‘원흉’ 정철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게 됐다.
기축옥사에 대한 강경한 진압은 정철에 대한 선조의 신임을 더욱 굳건히 했다. 이듬해 2월 정철은 좌의정에 승진하고, 7월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책봉되면서 인성부원군의 봉호를 받았다. 하지만 정철의 승승장구는 채 1년도 가지 못했다. 선조에게 왕의 후계자인 세자를 세울 것을 건의한 ‘건저(建儲)’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1591년(선조 24년) 2월 좌의정 정철은 당시의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은 선조에게 함께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고 했다. 선조가 여러 차례 양위(讓位) 파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의 공론은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 광해군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정철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함께 건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선조의 의중이 다른 왕자에게 있다는 것을 파악한 이산해와 류성룡이 자리를 피했고, 성질이 급한 정철이 경연에서 홀로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샀다.
이후 정철은 선조의 노여움과 더불어 ‘평소 주색에 빠져 생활이 문란하고, 당을 꾸며 경박한 무리를 모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됐다.
이후 정철은 진주를 거쳐 평안도 강계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결과적으로 정철이 선조의 참모로 다시 복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선조가 자신의 피난길을 함께할 인물로 ‘충직한’ 정철을 불러들인 것. 정철은 선조의 부름을 받아 1592년 5월 평양에서 선조를 만나고, 6월 11일 평양성을 떠나는 선조를 호위해 의주까지 피난길을 함께했다. 이해 7월 정철은 양호(兩湖·호남과 호서) 체찰(體察·변란이 있을 때 왕을 대신해 그 지역의 군무를 살피는 일)의 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했으며, 1593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반대 정파의 공격 또한 워낙 극심해 명나라에서 돌아온 직후 다시 동인이 중심이 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선조에게 사면을 청한 후 강화의 송정촌으로 물러난 정철은 이후에는 더 이상 선조 곁을 지키지 못하고 1593년(선조 26년) 12월 18일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정철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국문학이나 한문학 분야에서 정철은 최고의 인물로 손꼽힌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정철은 크게 조명받지 못할 뿐 아니라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당쟁 시대에 서인의 핵심으로 활약하고, 1589년 기축옥사를 주도한 인물이란 점 때문이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그만큼 선조에게 정철은 정국 돌파에 매우 필요한 정치적 참모였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21호 (2017.08.16~08.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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