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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상소문으로 문정왕후 수렴청정 비판한 조식 "慈殿(문정왕후)은 과부이고, 殿下(명종)는 어린 고아시니.."

바람아님 2017. 8. 24. 10:13
매경이코노미 2017.08.07. 09:50
1555년(명종 10년) 조정에 올라온 한 장의 상소문은 명종 시대 정국을 요동치게 했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남명(南冥) 조식(1501~1572년)으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평생 관직을 사양하고 스스로 처사(處士)로 불리기를 원했던 선비학자 조식은 1555년 조정에서 제안한 단성현감을 마다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상소문을 올렸다. 어떤 내용이었기에 이처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까.

조식이 올린 상소문은 왕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어 민심이 떠나고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돼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됐습니다.”


조식은 정치가 잘못된 원인을 무엇보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서 찾고 있다.

“자전(慈殿·왕의 어머니,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문정왕후는 인종 승하 후 자신의 소생인 11세의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윤원형 등 외척 세력을 대거 끌어들였다. 이에 따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상적인 정치가 이뤄지지 못하고 권력이 소수의 외척 세력에게 집중됐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게 되는 형국이 됐다. 조식은 잘못된 정치 현실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선비의 책무로 여겼다. 왕에게 불경한 표현이 될지언정 직선적인 상소문을 올린 것은 이런 생각에서였다.


이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대목에 대해 명종이 ‘군상불경죄(君上不敬罪)’로 역정을 낼 만큼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정왕후에 대한 불만이 벽서 형태로 나타난 경우는 있었지만, 조식처럼 직언하는 상소문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없었다. 조식에 대한 처벌 주장이 제기되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상당수 대신이나 사관들이 “조식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는 논리로 조식을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았다.


조식의 상소문 파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16세기 언관과 사관들의 언론 보호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점이다. 조식 상소문에 대해 당시 조정에 포진했던 대신들이나 언관들은 조식을 적극 변호했고, 궁극적으로 명종의 불편한 심기를 완화시켜 조식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조정 대신들과 언관,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자 조식에 대한 처벌은 왕의 언론 탄압으로 비화됐고, 결국 명종은 조식을 처벌할 수가 없게 됐다. 조식의 상소문 파문은 명종 시대에 재야의 언론까지 수용하는 정치 문화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왕 앞에서 당당하게 할 말을 한 재야 선비 조식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조식의 호는 남명, 본관은 창녕으로, 1501년 외가인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아버지 조언형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언형이 문과를 거쳐 판교에 오르고 숙부 언경이 이조좌랑에 올랐지만 사화의 여파는 강직한 선비 집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1519년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숙부 언경은 조광조 일파로 지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조식의 처가는 일찍이 전라도에서 이주한 남평 조씨로 장인 조수는 김해에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부호였다. 조식은 한때 처가 소재지인 김해 탄동에 거주하면서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힘썼는데, 그가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던 데는 부유한 처가의 힘이 컸다.

조식은 젊은 시절부터 제자백가의 여러 학문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에는 금기시되던 노자나 장자의 문장에도 흥미를 느꼈다. ‘남명’이라는 호는 ‘장자’의 ‘소요유’ 편에서 인용된 것이다.


조식은 어린 시절 부친의 임지를 따라 한양 장의동 부근에서 살았다. 30세에서 48세까지는 처가인 김해, 48세에서 61세까지는 합천에서 거처한 후 만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김해, 합천, 진주로 이어지는 경상남도 지역은 남명 학문의 산실이었다. 조식은 61세가 되던 해에 합천을 떠나 지리산 산천재에 마지막 터전을 잡았다.

조식은 무엇보다 학문에 있어서 수양과 실천을 동시에 강조했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조식 사상의 핵심이다. 조식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중요시했다. 특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제자들에게 늘 강경한 대왜관(對倭觀)을 심어줬다. 임진왜란 때 그의 문하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최고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식은 생전에 10여차례 이상 지리산을 유람했고 지리산을 노래한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죽음도 말년까지 후학을 길렀던 지리산 산천재에서 맞았다. 묘소는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앞으로 덕천강이 흐르고 뒤로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그를 배향한 덕천서원도 인근에 조성돼 있다. 현재 조식의 학문적 연고지인 경남 산청에는 조식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2015년 설립한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조식 하면 당대에 늘 비교되곤 했던 인물이 퇴계 이황(1501~1570년)이다. 대부분 이황과 가장 선명하게 비교되는 인물로 율곡 이이(1536~1584년)를 꼽지만 이이는 이황과 조식의 후배 학자며, 이황의 가장 큰 라이벌은 조식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1501년) 영남 지역에 태어나서, 당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분류됐다. 경상도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뉘었는데, 이황의 근거지 안동과 예안이 경상좌도의 중심지였으며, 조식의 근거지 김해, 산청, 진주는 경상우도의 핵심 지역이었다. ‘좌퇴계 우남명’으로 지칭된 것도 두 사람이 지역을 대표한 학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학자는 기질과 학풍, 현실관 등에서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이황이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발전시켜간 유학자로서 당시의 지적 수준을 높여갔던 학자라면, 조식은 경과 의를 바탕으로 성리학의 실천을 중시한 학자였다. 이황이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조식은 사단칠정 논쟁에 대해 “이것이 백성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일침을 가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조식과 이황을 영남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정하면서 ‘이황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조식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비교했다. 조식의 의(義)는 상벌에 엄격한 무인의 기질에 어울리며, 그가 차고 다녔던 ‘칼’과 맥락을 같이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현실 인식에도 반영됐다. 이황과 조식은 사화를 겪으며 출사(出仕)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나 명종대 이후 현실의 모순이 점차 해소됐다고 판단한 이황은 관직에 나아가 경륜을 펴는 것 또한 학자의 본분으로 여겼다. 이황과 달리 조식은 자신이 살아갔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파악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 곧 처사로 남을 것을 다짐하고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왜적에 대한 입장도 서로 달랐다. 이황이 일본과의 강화 요청을 허락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등 주로 교린(交隣) 정책을 펼친 반면 조식은 일본에 대한 강력한 토벌 정책을 주장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는 강경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활약하면서 명종 시대의 정국과 학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 이황과 조식. 비록 왕의 측근에서 활약한 정치 관료는 아니었지만 당대는 물론, 후대 조선에 미친 학문적, 사상적 영향을 볼 때 이 시기를 살아간 대표 참모이자, 지성이라 말할 수 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19호 (2017.08.02~08.08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