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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선조에 왜란 대비 강조했던 이이 경제·군사·사회개혁 주창한 선구적 사상가

바람아님 2017. 9. 5. 09:32
매경이코노미 2017.09.04. 09:32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년).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한국사를 대표하는 모자로 많은 사람이 기억한다. 과거를 비롯해 각종 시험에만 무려 9번이나 장원급제했던 탁월한 수재 이이. 그는 사림 사회가 점차 위기를 맞아가던 16세기 명종과 선조 시대를 살아가면서 안으로는 성리학 이념의 정착과 당쟁 조정, 밖으로는 국방의 안정을 위해 전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16세기 중반, 조선 사회는 외척과 권신의 정치권력에 맞서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정치의 주도 세력이 되는 시기였다. 네 차례의 사화(士禍) 속에서 훈구파에게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사림파는 1567년 선조 즉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훈구파 비판이라는 공동의 목표는 있었지만 중앙 관직에 진출하면서는 제한된 자리를 둘러싸고 사림파 내에서 분열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된 당쟁의 시작이다. 이이는 당파 간 화합을 의미하는 조제(調劑)책을 내세우며 당쟁 조정에 앞장섰지만 그의 지역적 기반인 경기 지역 학자들이 대부분 서인이 되면서 이이 또한 서인의 영수로 추대됐다. 정치적, 학문적 명망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이이는 1536년 외가인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이원수와 신사임당 사이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자는 숙헌, 호는 율곡, 본관은 덕수다. 외조부 신명화는 조광조와 뜻을 같이한 기묘명현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이를 낳던 날 어머니 신사임당의 꿈에 용이 침실로 날아올랐다 해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 어릴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불렸다.

6세가 되던 1541년, 한양 수진방(현재의 서울 청진동)에 있는 본가로 돌아온 이이는 이후 집안 대대로 터전을 잡았던 고향 땅 파주의 율곡(栗谷·밤골)을 오가며 살았다.


어린 시절 이이의 교육과 인격 형성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어머니였다. 늘 의지가 됐던 어머니 신사임당이 이이가 16세가 되던 1551년에 사망하자, 이이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3년 동안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마친 후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느꼈다. 이때 그의 마음을 끌어당긴 게 불교였고, 그는 금강산으로 향했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세상의 번뇌를 모두 벗어던지고 불교에 빠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사후 세계를 생각하는 불교보다는 현실 문제점을 중시하는 유학이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고 1555년 금강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스스로 경계하는 의미의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성리학에 전념했다. 22세 되던 해 한양에서 이웃에 살던 노경린의 딸과 혼인했으며, 고향인 파주 밤골에 살림을 차리고 ‘율곡’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558년 이이는 성주목사로 있는 장인에게 들렀다가 예안으로 향했다. 당대 최고 학자인 이황이 예안의 도산서당에 터전을 잡고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이는 이황에게 성리학 이론에 대해 질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이이는 도산서당을 떠난 뒤로도 이황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 수준을 높여나갔다.


이이는 1558년(명종 14년) 23세 때 별시에 장원급제해 본격적으로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의 시제(試題)는 천도책(天道策)이었고, 이이는 천인합일설을 논지로 답했다. 1564년에는 생원시와 진사시, 문과 복시와 전시에 모두 장원급제하는 등 총 아홉 번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다. 그야말로 ‘시험의 달인’이었다. 이이가 관직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지 얼마 뒤인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새 국왕 선조가 즉위했다. 이이는 왕의 학문을 담당하는 경연관의 직책을 맡으면서 16세 선조를 성군의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군주가 학문에 힘쓰고 정치를 바로 해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잡힌다는 생각에서 열성적으로 경연관의 임무를 수행했다.


중앙에서 관직 생활을 주로 했던 이이는 청주목사로 발령받아 잠시 중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청주목사 시절 이이는 자신의 학문을 현장에서 직접 실천할 기회를 잡았다. 백성들을 위해 향약을 실시한 것. 향약은 주자의 ‘여씨향약’에서 비롯된 것으로 성리학 이념에 입각해 마을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하고 향촌의 결집력을 강화시키는 제도였다. 향약은 서원과 함께 사화기 동안 실세(失勢)한 사림 세력들이 향촌에서 백성들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재기하는 데 큰 힘을 실어줬다. 이이가 청주에서 실시한 서원(西原·청주의 옛 이름)향약은 이황의 예안향약과 함께 훗날 향약의 모범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1574년(선조 7년) 이이는 각종 재해가 연이어 닥치자,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이는 당시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풍속의 사치와 문란함이 오늘날보다 심함이 없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 위에 가득 채워놓고 뽐내기 위한 것이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다투기 위함이다. 한상을 차리는 비용은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몇 달 치의 양식이 될 만하며, 옷 한 벌의 비용은 헐벗은 자 열 명의 옷값이다. (중략) 어찌 백성들이 굶주리고 헐벗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조는 이이의 상소를 수용하기는 했지만 제도 개혁에는 이르지 못했다. 여전히 국정을 낙관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이는 여러 차례 상소문을 올려 국정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잘 수용되지 않자 1577년 해주의 석담으로 돌아갔다. 이곳에 머무르며 아동을 위한 학습에도 신경을 썼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아동 지침서인 ‘격몽요결’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이는 자신이 살아가던 시기를 중쇠기(中衰期)로 인식했다. 조선 건국 후 200년이 지나 서서히 붕괴의 조짐이 일어나는 시기로 본 것이다.

“우리 조정이 나라를 세운 지 거의 200년이 되니 이는 쇠퇴기에 접어든 것이다. 권세 있고 간사한 신하들이 혼탁하게 어지럽혀 화가 많아졌다. 조선은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는 형세(土崩瓦解之勢)’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앉아서 절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개혁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파악하고, 그 시기를 잃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다.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경장(更張·정치나 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혁)책을 제시했던 것도 조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과거 외에 다른 방법으로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 서얼에게 벼슬길 개방,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되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도록 유도,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통폐합해 ‘작은 정부’를 실현, 폐정(弊政)의 혁신을 주도하기 위한 기관으로 경제사(經濟司)를 설치, 언로 활성화 등 다양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경제 분야에서도 정부 지출의 축소와 세수(稅收) 확대를 통한 국가 재정의 확충, 공물(貢物)과 방납(防納)의 폐단 시정 등을 제시했다. 이이가 주장했던 수미법(收米法·공물을 쌀로 거두는 제도)은 훗날 대동법의 기반이 됐다.


이이의 경장책에서 특히 돋보이는 분야는 병제 개혁이다. 그는 병적(兵籍) 정비를 통한 병력 확보, 각 도마다 병력 양성, 즉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아쉽게도 이런 조치는 실천되지 못했다.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선조실록’에는 기록돼 있지 않고 서인들이 주도해 효종대 완성된 ‘선조수정실록’에만 내용이 담겨 있어 그 진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이이가 평소에 늘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스승의 언행을 후대에 제자들이 정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이가 “미리 10만 군사를 양성해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류성룡이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를 키우는 것이다”라며 매우 강력히 반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0만 양병설은 훗날 동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이는 사후에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이가 죽은 뒤 조선 조정은 사분오열이 됐다. 임진왜란 때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졌다. 이이가 평소 걱정했던 점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후 조선이 극심한 혼란에서 벗어나면서 이이가 건의했던 각종 정책이 줄줄이 채택됐다. 국론과 민언(民言)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했다.

조선이 위기를 겪었던 16세기 중후반기 학문과 정치에 있어 최고의 능력을 보인 이이. 그의 일생은 국가와 백성을 위한 경장책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마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실천가, 사회개혁가로서 그의 모습은 당시 최고의 참모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23호 (2017.08.30~09.05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