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5> 왜 경운궁으로 이차했을까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갑오왜란)으로 조선은 사실상 멸망했고 그때부터 고종은 궁궐 안에 포로로 유폐됐다. 아관망명은 그 포위망을 뚫고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 공관으로 탈출한 것이었다. 경복궁으로의 환궁은 다시 포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고종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일 항전을 지속하기 위해 러시아 공관 못지않게 안전이 보장된 ‘새로운 국내 망명지’를 창출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경운궁이었다. 1907년 7월 고종이 퇴위당한 뒤부터 ‘덕수궁’이라고 바꿔 불린 곳이다.
아관망명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의 중심엔 러시아가 있었다. 당시 고종의 입장에서 의지할 곳은 러시아밖에 없었다. 경운궁의 안전 보장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고종은 러시아 정부와 물밑 작업을 시도했다. 일본은 조선과 러시아를 이간질하기 위해 교활하게 움직였다. 조선은 러시아를 한반도로 끌어들이려 했고 일제는 러시아를 밀어내려고 하는 형국이었다. 러시아는 아관망명으로 조선에서 입지가 크게 강화됐음에도 그 유리한 정세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우리로선 안타까운 대목이다. 고종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에게 군사·경제 동맹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그 순간 러시아는 조선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 동시에 일본과 열강의 눈치를 봤다.
러시아, 일본 눈치 보며 소극적 對韓 정책
아관망명 이후 수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이 러시아에 접근하면서 ‘베베르·고무라 각서’가 만들어진다. 조선 대표 없이 열린 어처구니없는 회의였지만 러시아가 조선의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조선 국왕 폐하의 왕궁으로의 환어 문제는 전적으로 폐하 자신의 재량 판단에 일임한다”는 조항을 맨 앞에 배치했다. 어찌 됐든 이는 조선의 ‘아관망명정부’를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효과가 있었다. 단 3항과 4항에서 조선을 러·일 양국이 공동보호국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다소 모호한 문구를 넣어둔 것은 문제였다.
‘베베르·고무라 각서’가 체결된 지 12일 후인 5월 26일은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 날이었다. 전 세계의 외교사절이 러시아에 집결했다. 고종의 특사로 민영환도 파견돼 니콜라이 2세를 접견하고 로바노프 외상과 ‘민영환·로바노프 각서’(1896. 6. 30)를 체결했다.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과 ‘민영환·로바노프 각서’는 거의 동시에 진행됐다.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에 두 나라가 조선을 공동 관리하는 비밀 조항을 둔 것은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베베르·고무라 각서’에서 모호하게 표현된 ‘조선 공동 관리’ 의도가 확실해진 것으로 일본의 제안을 러시아가 수용했다.
그런 가운데 민영환은 로바노프에게 5개 항목을 요청하는데 사실상 군사·경제 동맹 제안이었다. → 조선군이 신뢰할 수 있는 병력으로 훈련될 때까지 러시아 수비대의 국왕 보호 → 러시아 군사교관들의 파견 → 국왕 관리하의 궁내부 재정· 군사문제·광산·철도 등을 위한 고문 파견 → 양국에 이로운 조건으로 조선과 러시아 간 전신선 연결 → 일본 차관을 갚기 위한 300만 엔의 차관 제공.(『윤치호 일기(4)』, 1896. 6. 5)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완전히 전락하기 이전의 윤치호가 이 사절단에 통역 서기관으로 동행해 기록을 남겼다.
궁궐수비대, 차관 요구 모두 무산
민영환도 현지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에 공동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영환이 6월 5일 로바노프와의 대담에서 ‘공동보호국’ 지위를 거부하고 러시아 단독의 책임을 요구하는 데서 그런 점이 드러난다. “조선은 몇 년 전 양국을 긴밀한 우호 관계로 묶는 비밀 조약을 러시아와 체결했다. 우리는 러시아의 후원을 신뢰해 일본이 1894년 이래 요구한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본을 일부 조선 반역자들과 함께 10월 8일의 범죄(을미왜변)를 저지르도록 몰고 갔다. 조선 사람들은 이 부정을 통감하며 러시아에 도움을 바라고 있다. 따라서 5개 항 요구가 제시된 것이다. 러시아는 조선이 책임을 단독으로 맡기를 기대하는 유일한 나라다.”(『윤치호 일기(4)』, 1896. 6. 5)
민영환이 6월 13일 로바노프를 다시 만나 거듭 궁궐수비대를 요청하자 로바노프는 “우리가 수비대를 궁궐 안으로 파견하면 영국과 독일은 불쾌히 여길 것”이라며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거부한다. 그 대신 국왕 이차 후 “도덕적 안전 보장”을 제시했다.(『윤치호 일기(4)』, 1896. 6. 13) 이때 로바노프는 궁궐수비대를 불쾌히 여길 나라로 일본을 든 게 아니라 영국과 독일을 언급했다.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에서 이미 궁궐수비대 문제를 일본에 양보한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로바노프가 말한 ‘도덕적 보장’이 무슨 뜻인지는 러시아 외무성 아시아국장 카파니스트 백작의 부연 설명에서 확인된다. 한반도 안에서 일본의 행동에 대한 국제정치적 견제를 통해 국왕과 조선의 안전을 간접적·비군사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뜻했다. 그 같은 장치는 ‘베베르·고무라 각서’ 등을 통해 이뤄졌다고 로바노프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파니스트 백작은 이어 또 하나의 ‘제3의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러시아 공사관 경내 주둔 병력을 늘리는 일이었다. 이에 민영환이 “유사시에 (공사관 경내 주둔) 수비대가 국왕의 보호를 위해 궁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를 추가로 묻자 카파니스트 백작은 이렇게 말했다. “베베르가 10월 8일(을미왜변) 궁궐에 들어간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들었다. 그가 그때 (휘하에) 어떤 수비대가 있었다면 아마 이 수비대를 데리고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윤치호 일기(4)』, 1896. 6. 16) 러시아 수비대가 유사시 경운궁에 들어가 고종을 보호할 수 있다는 은밀한 암시였다(황태연,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669~673쪽).
고종은 ‘베베르·고무라 각서’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의 구체적 내용을 그 시점에 통보받지 못했지만, 베베르의 구두 전언이나 외국 신문 등을 통해 대강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고종은 조선의 공동보호국 지위를 강요하는 러·일 양국의 의도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 이런 의중은 당시엔 정부 대변지 역할에 충실했던 ‘독립신문’의 냉소적 논설에서 잘 드러난다. 아직 ‘친일파의 소굴’로 변절하기 전의 초창기 독립신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근일 일본 신문들에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같이 보호한다는 말이 많이 있으되 우리 생각에는 이 말이 실상이 없는 것 같거니와 우리가 이런 일은 원치도 않노라.…만일 두 나라에 보호국이 되면 그것은 상전 둘을 얻는 것이니…일본과 청국이 싸운 후에는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고 말로는 했으되 실상인즉 일본 속국이 됨 같은지라 조선 내정과 외교하는 정치를 모두 진고개 일본공사관에서 조처했으니 독립국에도 남의 나라 사신이 그 나라 정부 일을 결정하는 나라도 또 있는지 우리는 듣고 보지 못했노라.”(『독립신문』, 1896. 5. 16)
‘적절한 동맹’ 부족했지만 대안 없어
러시아가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는 일본의 탐욕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의 동북아 정책은 만주와 한반도를 저울질하면서 만주 쪽에 중점을 두고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베베르·고무라 각서’가 문제는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불완전하나마 세력 균형 체제를 이루는 효과도 있었다. 이로써 조선을 멸망시킨 일제의 공세는 일단 저지되었고 갑오왜란은 소강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차관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1896년 10월 21일 푸차타 대령 등 14명의 군사교관을 조선에 파견했다. 고종은 이 소규모 교관단을 최대로 활용했다. 신속히 821명의 조선군 정예병을 엄선해 재훈련시켰고 1896년 12월 중순께에는 훈련을 마치고 ‘경운궁 호위’에 투입할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안전 조치를 마련한 뒤에 비로소 고종은 경운궁으로 이차했다. 곧이어 고종은 200명의 장정을 추가로 모집해 신식 군사훈련을 수료케 함으로써 1897년 3월 16일 사상 초유로 정치적·군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1000여 명의 조선 신식 군대인 ‘시위대’ 1개 대대를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위대는 5년 만에 3만 명으로 확대되는 대한제국 육군의 모체가 된다. 경운궁을 수비할 시위대 병력의 확보, 경운궁과 러시아 공관의 지근거리, 러시아 공사관 내 러시아 병력의 상주(常駐)와 유사시 경운궁 내 투입을 묵인한 러시아 외무성 책임자의 극비 언질, 그리고 ‘베베르·고무라 각서’ 등 일련의 복잡다단한 대내외적 조치 이후에 고종이 이차를 단행했다는 점에서 경운궁은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확장된 ‘제2의 국내 망명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황태연,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637~681쪽).
각종 안전장치를 통해 경운궁은 ‘사실상 치외법권적 지역’처럼 되었지만 한계도 뚜렷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약화되면 즉각 이 국내 망명지는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고종 앞에는 더 큰 과제가 놓여 있었다.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에서 드러난 ‘조선 공동관리국화’ 기도를 어떻게 분쇄해 독립국의 지위를 확보할 것인가. 1897년 10월 12일 전격 선포하는 대한제국 창건에서 고종의 또 한번의 반격을 확인할 수 있다.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서울역사박물관
참고자료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이상 청계·2017),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최덕수 외·열린책들·2010), 『해천추범: 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민영환·책과함께·2007), 『윤치호 일기』(국사편찬위원회 편·탐구당·1971)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