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9] & [10]

바람아님 2017. 9. 20. 18:28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9] 도굴꾼 '無知' 덕에 살아남은 2000년 된 보물상자


(조선일보 2017.09.06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옻칠 된 대나무 바구니, 길이 65㎝, 국립중앙박물관.창원 다호리 1호 무덤, 옻칠 된 대나무 바구니, 길이 65㎝, 국립중앙박물관.


1988년 1월 하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에 제보가 접수됐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창원 주남저수지 주변 동네 다호리에서 중요한 유물이 

도굴되었다고 했다. 이건무 부장은 곧바로 이영훈 학예관, 윤광진 학예사를 대동하고 

창원으로 향했다. 다호리 유적 일대는 처참했다. 유적이 분포된 논바닥 곳곳에서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다.


발굴에 착수한 것은 1월 21일. 혹한의 추위에도 무덤 속은 질퍽거렸다. 

구덩이 안에서 도굴꾼이 흘리고 간 쇠도끼, 옻칠 된 부채자루 등이 수습됐다. 

조사를 이어가던 윤 학예사가 소리쳤다. 

"부장님! 목관이 있어요. 통나무예요."

 2000년 전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좋은 목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희망을 가지고 목관 내부까지 다다랐으나 유물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목관을 수습하는 날. 끈을 넣어 목관에 감고 장비를 이용해 들어 올리는 순간 무덤 속에 있던 윤 학예사의 다급한, 

그러나 환희에 찬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쫙 깔렸습니다. 유물이 엄청 많아요." 

목관을 들어 올린 다음 그 속을 바라본 조사단원들은 감격했다. 

도굴꾼은 목관 아래에 유물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목관을 내릴 때 사용한 노끈,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옻칠 목기, 제사를 지내면서 뿌려진 밤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특히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수많은 보물이 가득 담긴 대나무 바구니였다. 

이토록 보존 상태가 좋았던 것은 무덤 바닥에서 샘이 솟아 늘 촉촉한 상태를 유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이건무 부장은 바구니 속 유물 가운데 붓 5자루와 삭도(削刀) 1점에 주목하며 

"고대사회 관리들이 문서행정을 할 때 사용하는 필수품으로 이미 2000년 전 변한(弁韓)에서 문자생활, 

더 나아가 문서행정을 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라 해석했다. 

이토록 소중한 유물이 하마터면 도굴꾼의 손을 탈 뻔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진다.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10] 풍납토성 우물 속 龍王에게 지낸 제사


(조선일보 2017.09.20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풍납토성 우물 출토 토기류, 높이 18.4㎝(앞줄 중간), 한신대학교박물관.풍납토성 우물 출토 토기류, 높이 18.4㎝(앞줄 중간), 한신대학교박물관.


2008년 6월,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 현장을 지휘하던 한신대학교 권오영 교수의 

머릿속엔 무거운 짐 하나가 남아 있었다. 

206호라 이름 붙인 네모난 구덩이 때문이었다. 

한 변 길이가 11m, 깊이가 3m나 되는 이 구덩이를 8년 전에는 연못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재발굴 시 구덩이 표면 한가운데서 둥근 돌무지가 드러나 목탑 터일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었고, 다시 돌무지 하부에서 우물처럼 생긴 정연한 석축 시설이 드러난 

것이다.


석축 너비가 120㎝밖에 되지 않았기에 한신대학교박물관 한지선 연구원이 혼자 들어가 조사를 맡았다. 

6월 13일 정오 무렵 한 연구원은 돌로 쌓은 벽석 아래에서 나무로 만든 구조물과 함께 그 안에 가득 채워진 펄을 발견했다. 

이 구덩이는 마침내 우물로 확정됐다. 한 연구원은 펄을 조심스레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꽃삽 끝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걸렸다. 조심스레 드러내니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토기가 층층이 깔려 있었다. 

완형만 헤아려도 215점. 그간 여러 유적에서 우물이 숱하게 발굴됐지만 이처럼 토기가 많이 묻힌 사례는 없었다.


발굴 책임을 진 권 교수는 우물의 구조와 주변 시설물을 토대로 어정(御井·왕의 우물)으로 추정했다. 

더불어 토기 215점 가운데 충청과 전라 지역에서 제작한 것이 여러 점 포함돼 있고 그중 대부분에 제사 토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손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5세기 초 백제 어정에서 지배층의 결속을 다지는 성스러운 물의 

제사가 거행된 것은 아닐까?" 추정했다.


고대인들은 우물을 신성시했다. 

우물은 사람이 '탄생'시켰지만 그 속에 용왕이 산다고 생각해 우물을 폐기할 때 정중한 제사를 지내곤 했다. 

바로 풍납토성 우물 속 토기도 폐기 제사에 사용한 일종의 제물이었던 것이다. 

다만, 평소 잘 관리했을 이 어정이 왜 그 시점에 이르러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