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9.27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 보물 1844호, 길이 25.5㎝, 국립경주박물관.
1975년 3월 25일, 경주 월성 동편에서 발굴이 시작됐다.
넉 달 전 정식 발굴 조사 없이 안압지 준설공사를 하다가 다량의 유물이 드러나자 긴급히
실시하게 된 발굴이었다. 안압지는 바로 신라 궁궐 속 연못인 월지(月池)였다.
신라 문무왕 때 처음 만들어진 이 연못은 신라와 영욕을 같이했고 유물 3만여 점을 품고 있다가
이 발굴을 통해 고스란히 토해내게 된다.
4월 11일. 발굴을 시작한 지 2주를 넘긴 시점이었으나 아직 중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조사원들은 연못의 호안석축 가운데 서쪽을 노출하는 한편 연못 내부 펄을 조금씩 제거해나갔다.
오후가 되어 석축 동쪽으로 1.1m 떨어진 지점에서 이색적인 풍모를 지닌 금동가위 1점을 발견했다.
색깔만 조금 변했을 뿐 당장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생생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알코올로 조심스레 세척하며 살펴보다 범상치 않은 조형미와 세공 기술에 탄성이 절로 났다.
우선 형태부터가 남달랐다. 손잡이는 좌우로 조금 벌어졌는데 마치 두 마리의 봉황이 서로 머리를
교차하는 형상이었다. 표면 전체에 인동당초무늬가 빼곡히 조각되어 있고 물고기 알처럼 생긴
동글동글한 무늬가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윗날 윗면에 각각 반달 모양의 조각이 덧붙여져 있었는데 초의 심지를
자를 때 심지가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고안한 것으로 추정됐다. 비록 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실용성, 멋진 조형미, 정교한 무늬를 두루 갖춘 명품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 가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과 매우 비슷한 모양의 가위가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5월 6일, 이 가위가 공개되자 이튿날 주요 일간지에 '신라 문물의 일본 전수를 보여주는 증거'라 대서특필됐다.
신라 연못에서 우연히 출토된 가위 한 점이 신라 공예 문화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류 관계를
생생히 전해주었다. 2014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은 이 가위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보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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