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해머로 맞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 ‘민족’, ‘조상’, ‘애국’이란 낯선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에서 잊었던 언어들을 현실 세계로 소환한 이는 지긋한 연세의 할아버지였다.
해머의 충격을 받은 때는 추석 연휴를 앞둔 며칠 전이었다. 아내와 함께 재래시장에 갔다가 노래자랑 행사를 보게 되었다. 그때 헙수룩한 행색의 한 노인이 무대에 오르더니 노래 대신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쉼 없이 이어졌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국민정신 개조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당대의 석학들을 동원해 헌장의 초안을 만든 뒤 국회 본회의 표결을 거쳐 선포한 교육지표이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애국이란 국민정신을 일깨워준 공은 부인할 수 없다. 시대와 정권이 바뀌면서 사람의 생각이 변했어도 우리 삶의 터전인 국가의 소중한 가치는 불변이다.
우리는 선배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국가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도 나라를 생각하는 정신은 도리어 궁핍해졌다. 국가에 대한 자기 의무는 다하지 않은 채 국가가 더 많은 것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 결과가 나랏빚을 눈덩이처럼 키우는 복지 포퓰리즘이다. 자기만 내세우는 이런 풍토에선 건전한 국민정신이나 애국심은 자라날 수 없다.
얼마 전 특수학교 설립을 놓고 벌어진 토론회장의 풍경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이기심의 일단을 보여준다. 주민들이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반대하자 장애인 부모들이 강당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일부 주민은 그들을 향해 “쇼하지 마라”고 소리쳤다. 안타깝고 부끄럽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 ‘내 땅에는 안 된다’는 님비(NIMBY) 현상이 곳곳에 만연한 까닭이다. 북한 김정은의 도발 앞에서도 멈추지 않은 성주의 사드 반대 시위는 또 어떤가. 재래시장 무대에 오른 노인의 외침에서 길 잃은 국민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한 지인에게서 브라질 교포 1세대인 장승호 할아버지의 동포애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일제시대에 홀로 남미로 건너간 그는 망한 조국이 너무 그리웠다. 할아버지는 산토스항에 큰 배가 들어오면 용수철처럼 뛰쳐나가 대형 태극기를 흔들었다. ‘혹시 거기에 한국인이 타고 있지 않을까’ 하고. 드디어 6·25전쟁이 끝나고 50명의 한국인 전쟁포로가 브라질로 들어오자 가족들을 이끌고 항구로 마중을 나갔다.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따뜻이 보살폈다. 뜨거운 애국은 93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 날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립하기까지에는 동포들을 가슴으로 품은 장승호 할아버지, 남침하는 북한 탱크를 맨몸으로 막은 젊은 장병, 광복을 위해 목숨을 던진 독립투사, 그리고 외적에 맞서 싸운 흰옷 입은 백성들의 눈물과 희생이 있었다. 그들의 헌신 위에 지금 나의 자유와 행복이 존재한다. 좌든 우든 그것을 잊는다면 비양심이다.
내일이면 사상 최장의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고향에서 ‘우리’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사회나 국가라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작은 우리’에 갇혀 ‘큰 우리’를 잊고 산다. 이번 추석에 그 하나만 가슴에 새겨도 최장 연휴에 걸맞은 최고의 명절이 될 것이다. 추석 전의 우리와 추석 후의 우리는 분명 달라져야 한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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